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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붉은 눈보라, '데이터'에 맞선 '36.5℃' [특파원칼럼]

머니투데이 뉴욕=심재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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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붉은 눈보라, '데이터'에 맞선 '36.5℃' [특파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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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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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의료 시스템의 심장부가 멈춰 섰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맨해튼 86번가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 앞을 붉은 유니폼 물결이 에워쌌다. "안전한 인력 배치가 생명을 구한다(Safe Staffing Saves Lives)." 단순한 임금 투쟁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을 숫자로 치환하려는 알고리즘에 맞선 간호사들의 파업 현장이다.

병원 경영진은 만성적인 간호사 부족으로 빚어진 이번 사태를 인력 공급 부족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미국 간호사협회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일침이 뼈아프다. "간호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이런 조건의 병원에서 일하려는 간호사가 부족한 것이다."

뉴욕 대형 병원들의 해법은 최첨단 AI(인공지능) 모니터링 시스템 도입을 통한 이른바 '스마트 병동' 구축이다. 알고리즘이 환자의 생체 신호를 분석해 간호 필요도를 산출하고 간호사 1명이 감당해야 할 환자 수까지 할당한다. 효율을 앞세우는 경영진에 AI는 간호 인건비를 최적화할 더할 나위 없는 도구다. 하지만 거리에 선 이들은 본질을 외면한 '차가운 도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한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15년차 간호사 사라의 말이 날카롭다. "환자의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면 AI는 0.1초만에 경고음을 울리죠. 하지만 환자의 눈동자가 공포에 흔들리는 것이나 임종을 앞둔 노인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망설이는 건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 행간을 읽고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입니다."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사람의 손길이 더 귀해진다는 역설이다.

찬바람에 상기된 붉은 물결 위로 서울의 의료 현장이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뉴욕의 병원들이 AI 도입을 명분 삼아 인력을 줄이려 한다면 한국은 필수의료 붕괴와 고령화의 파도 속에서 간호사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뉴욕의 간호사가 환자 4~5명을 돌볼 때 한국의 간호사는 15~20명을 감당한다. 한국의 간호사들이 오랜 시간 요구한 '간호사 1인당 환자 수 법제화'가 지지부진한 사이 효율을 앞세운 디지털 헬스케어가 빈틈을 파고들고 있다.

면허를 따고도 병원을 떠나는 한국의 수많은 '장롱 면허' 간호사의 뒷모습은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며 눈보라 속에 선 뉴욕 간호사들의 얼굴을 본질적으로 빼닮았다. 둘 모두 결국 '인간 돌봄의 가치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만난다. 간호사들의 파업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질이 잠식되는 이 모든 현장을 대변한다.


지금의 뉴욕은 데이터가 배달원의 경로를 통제하고 알고리즘이 기사를 쓰며 AI가 인간의 창의성마저 '데이터 라벨링'으로 치환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월가에서는 AI와 알고리즘이 실시간 거래 신호 분석과 포트폴리오 조정은 물론, 기업 인수·합병(M&A) 가치 평가까지 수행하면서 전통적 투자 애널리스트들의 판단과 경험이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

미국 전역으로 무대를 넓히면 최근 1년새 AI로 대체되거나 직간접 영향으로 일자리를 잃은 인력이 1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화이트칼라를 겨냥했던 칼날이 전문 서비스직 영역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기술이 화려해지고 건물은 높아지지만 인간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밤새 눈이 쌓여 도시의 소음을 집어삼킬 기세다. 하지만 병원 앞에 선 간호사들이 내뿜는 열기도 쉽게 식진 않을 분위기다. 뉴욕에서 벌어지는 이 원초적 투쟁은 조만간 전 세계가 맞닥뜨릴 '뜨거운 고민'의 예고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사람의 손길'에 얼마의 가치를 지불할 준비가 돼 있는가. 기술의 시대, '36.5℃의 전선'에서 눈보라가 던지는 질문이다.

뉴욕=심재현 특파원 urm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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