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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스포일러가 죄가 된 시대

조선일보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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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스포일러가 죄가 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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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단체 대화방에서 싸움이 났다. 발단은 최근 화제작인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 시즌2’였다. 눈치 없는 친구 하나가 우승자 이름을 툭 내뱉은 게 화근이었다. 아직 마지막 회를 보지 못한 이들의 원성이 빗발쳤고, 급기야 몇몇은 죗값을 치르라며 그를 단톡방에서 쫓아내자는 요구까지 했다. 실제로 또래 세대에게 스포일러(spoiler·이하 ‘스포’)는 거의 범죄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다. 조심성 없이 얘기했다간 빈축을 사기 십상이고, 심한 경우엔 ‘온라인 차단’이라는 가벼운 절교까지도 당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조금만 윗세대로 넘어가도 스포에 대한 감각이 무척 옅다는 점이다. 친구를 골려주려고 일부러 영화 반전을 떠드는 경우를 제외하면, 윗세대의 스포일러는 대부분 악의가 없다. 그저 대화 소재의 하나로서, 공통 경험을 끌어내려는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인식의 단층이 생겼을까. 본질적 원인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지상파 방송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모든 시청자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방송을 봤다. 한 번 놓친 방송은 재방송을 기다리지 않는 한 다시 볼 수 없는, 이미 흘러간 역사다. 오죽하면 TV 예약 녹화 기능이 혁신으로 불리던 시절이었을까. 그러니 다음 날 학교나 직장에서 전날 본 방송 내용을 떠드는 건, 공통 경험을 공유하는 친목 도모였지 악의적 스포가 아니었다.

하지만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이 보편화되면서 콘텐츠 시청의 ‘주권’이 방송사 편성표에서 개인에게 넘어왔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속도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비(非)동시적 시청’이 표준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제 누군가가 특정 콘텐츠를 언제 소비할지는 미지(未知)의 영역이 됐다. 옆 자리 동료가 1화를 보고 있을지, 이미 정주행을 마쳤을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과거처럼 전 국민이 일요일 밤마다 ‘개그 콘서트’를 보던 ‘국민 콘텐츠’ 시대의 종말이다.

이런 미디어 환경에선 하나의 집단에서 큰 화제를 모은 콘텐츠가 다른 집단에선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흔하다. 각자 서로 다른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에, 콘텐츠의 핵심 내용을 공유해 타인의 자율적 감상을 방해하는 건 실례일 수밖에 없다. 스포에 대한 민감도가 부쩍 올라간 이유다. 이런 변화가 잘 체감되지 않는다면, 주변 젊은 세대나 조카들 앞에서 최신 예능 결말을 한번 읊어보시면 된다. MZ세대의 스포에 대한 유난함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체험하실 수 있을 것이다.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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