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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너는 강물처럼 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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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너는 강물처럼 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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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시인 조던 스콧은 2025년 12월 부산국제아동도서전 북 토크 무대에 섰다. 자신이 글을 쓴 그림책들을 가지고 독자와 만나는 자리였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는 말을 더듬어 놀림받고 얼어붙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작가 자신의 아픈 어린 시절 교실 풍경이 모티프이다.

하굣길에 아버지는 아들을 강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뱃속에 폭풍이 일어난 것 같아 눈물을 흘리는 아들에게 말한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아이는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치”는 강물을 보고, 그 뒤로 울고 싶을 때마다, 말하기 싫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나는 강물처럼 말한다.” 그러면 울음을 삼킬 수 있게 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는 자연의 움직임 속에도 내가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작가는 후기에 말한다. “덕분에 내 입이 바깥세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와 감사를 이 아들은 이렇게 바치고 있다.

조던 스콧 자신은 아들에게 어떤 헌사를 받게 될까. 모르기는 하지만, 한국의 독자로서, 그의 북 토크를 몇년 전 함께했던 진행자로서, 몇번의 식사를 함께했던 친구로서 나의 찬사는 이렇다. 그는 말을 아주 잘 들어주는 따뜻한 사람이다. 종종 상대의 마지막 문장을 되풀이하며 동의하고, 놀라워하고, 감탄하고, 칭찬하고, 격려한다. 입을 오래 닫고 있는 사람에게는 질문을 던지며 대화로 끌어들이는 다정한 배려의 사람이다. 사실, 외국어 말하기는 말더듬기와 비슷하다. 문장은 머릿속에서 엉키고 발음은 입속에서 꼬인다. 틀릴까 두렵고, 웃음거리가 될까 얼어붙는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조던은 반짝이는 눈과 미소 어린 입으로 그런 두려움을 녹여준다. 나는 영어밖에 못해, 너는 영어도 하잖아!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와 대화할 때 나는 내 입이 영어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것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는 또 세상을 향해 환히 열려 있는 사람이다. 막걸리집에서는 모든 종류의 막걸리와 안주를 먹고 마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런 건 본 적도 없다던 육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돼지국밥과 소주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의 입은 나가는 말에 자유로운 만큼 들어오는 음식에도 자유로워진 모양이다. 다음에는 산낙지를 한번 권해볼까?

그를 보며 나는 어린 시절의 더듬기를 생각한다. 말, 생각, 행동, 관계에서의 더듬기. 거기에서 비롯되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당연히 더듬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당한 강물”처럼 물거품을 일으키고, 굽이치고, 소용돌이치고, 부딪치는 일이다. 다쳐 아프고 무섭고 외로울 때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오래 흘러 지금은 물결 부드럽게 일렁이는 잔잔한 강 같아진 이 작가를 보며 나는, 아프고 무섭고 외로운 경험은 좋은 인간이 되는 자양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아이들이 여러 면에서 더듬거리는 것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부딪쳐 넘어지고 끓어오르다 소용돌이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만 그 옆에서 ‘너는 강물처럼 말한단다’를 말해주는 어른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말없이 강가로 데려가 돌 위를 건너뛰고, 연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벌레를 잡고, 블랙베리를 따는 시간을 함께하는 어른이. 그러면 아이는 스스로 그 굴곡의 강을 즐겁게 흘러 잔잔하게 반짝이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을 환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어린이책과 그림책은, 바로 그런 어른의 역할을 해주는 분야이다. 부디 그런 책을 독자가 한 권이라도 만나게 되기를 바라며 연재를 시작한다.


김서정 어린이책 작가·평론가·번역가

김서정 어린이책 작가·평론가·번역가

김서정 어린이책 작가·평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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