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3월10일 당시 노동절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탈춤 공연. 필자 제공 |
환갑을 전후한 십여명의 여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2019년 가을, 서울 남영동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열린 원풍동지회 총회와 126명의 구술 증언록 출판기념식이었다. 양복지 ‘킹텍스’ 생산공장 원풍모방에서 1982년까지 일한 노조원과 그 자녀들, 어린 손주까지 삼대에 걸친 주최 쪽 손님과 외빈들로 공간은 빼곡했다. 헐렁한 검은 바지와 흰 티셔츠의 할미들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 눈자위가 붉어진 관객들은 때때로 박장대소하다가도 손수건을 꺼냈다. 탈춤에서 한삼을 휘날리는 할머니와 “얼쑤, 잘한다!” 대거리를 하는 관객들이 신기한지 아이들은 두리번거리다 까르륵거렸다.
행사 5개월 전, 이번에 탈춤 한번 춰볼까, 말이 나온 후 제주, 광주, 경기도까지 전국에 흩어져 사는 10여명이 매달 한차례 1박으로 만나 연습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양사위가 먼저니, 겹사위가 먼저느니 왈가왈부에, 대사 한줄 외고는 금방 ‘업은 아기 3년 찾는’ 격으로 헤맸다. 손주 백일잔치, 조카 결혼식, 무너진 비닐하우스 정비며 온갖 가정사도 많았으나, 이런저런 일들을 미루고 돌려막고 포기했다. “10분만 쉬자” 하고 보면 어느새 코를 골고, 10분 연습하고 나면 근육이 뭉친다고 아구구 비명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선 무대였다. 스무살에 높이 뛰던 팔다리는 이제 삐걱거리고 급히 만든 탈은 코 자리인지 입 구멍인지 답답해 무대 밖으로 던져 버리는가 하면 대사는 깜깜해 에이 모르겠다며 덩기덕 쿵덕 팔을 저어버려도 뭔 대수, 상관없었다. 40여년 전의 무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반갑고 먹먹한 공연이었다.
2019년 가을, 서울 남영동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열린 원풍동지회 총회에서, 40년 전 원풍모방 노조 탈춤반 회원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필자 제공 |
원풍탈춤반은 1979년 1월에 만들어졌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활동으로 교류하던 기독교장로회 청년회(기청) 탈춤팀이 원풍 노조 명절 잔치에서 두차례 한 공연과, 1978년 제일교회에서 상연한 노래극 ‘공장의 불빛’(김민기) 등이 계기였다. 몇차례의 탈춤과 마당극 관람을 통해 관심이 높아진 노조 지도부가 기청 활동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응한 덕이다.
노조는 3교대 순환근무로 나누어진 A, B, C반에서 각 열명씩 30명을 모집해 팀을 꾸린 후 그중에서 회장과 연구부장, 각 반 반장을 뽑았다. 나는 초기 연구부장을 맡았다. 대방동 돈보스코 회관에서 첫 수련회를 하며 회장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노동자, 민중, 농민의 자녀들로 사명 의식을 가지고 모였다. 결코 오락이나 흥미만 돋우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노동자문화를 찾는다는 보람과 긍지로 …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기반을 튼튼히 다져 가자.”
당시는 3월10일이 근로자의 날이었다. 1월에 탈춤반을 꾸리고 보니 3월이 코앞이라 즉시 공연 준비에 돌입했다. 첫 작품은 원풍노조 역사를 되짚는 동시에 기업주와 어용노조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실태, 그에 맞선 노동자들이 단결해 승리하는 내용이었다. 상류층을 상징하는 놀이판에는 부패와 쾌락, 음모의 장면들을 우스꽝스럽게 꾸미고 노동자 판에서는 부조리와 싸우는 노동자, 생각 말고 그냥 살자는 노동자, 기업주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노동자 부류가 등장해 우여곡절 끝에 단결해서 이기는 내용이었다. 매주 두세차례 퇴근 뒤 모여 대본 짜고 연습하느라 잠은 부족하고 고단했지만, 사는 맛을 느꼈다. 대사를 외우고 춤을 추는 눈들이 반짝였다. 연습하다 출근하는 야근반 동료에게 이 시절 우리가 나눈 정은 박카스였다. “이거 마시고 졸지 마” 꼭 쥐여준 음료를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기계 앞에서 대사를 읊으며 졸음을 이겨냈다. 기청 학생들은 매번 번을 정해 달려왔고 식당 아주머니들이 듬뿍듬뿍 식판을 채워주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장면에 따라 웃음과 야유가 넘나들다가 구사대가 노동자를 폭행하는 장에서는 일부 조합원이 울음을 터뜨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승리로 끝나 기쁨이 되었다. 공연장 가득 함성이 쏟아졌고 전 조합원의 흥겨운 뒤풀이로 이어졌다. 대중 앞에서 나를 춤추게 한 첫 무대이기도 했다.
원풍노조 65개 소그룹 중에도 특히 탈춤반이 도드라졌다. 공장 옥상의 뙤약볕 아래서 춤추고 상근자들이 퇴근한 노조 사무실에서 늦도록 뚱땅거렸다. 사무실 한구석에 풀주머니가 쌓이고 신문지를 불리고 이겨 만든 탈을 말리기 위해 온 탁자에 늘어놓았다. 급기야 탈춤반이 너무 몰려다니며 시끄럽다는 민원을 받기도 했다.
장구를 잘 치는 친구, 춤사위가 시원한 친구, 배역을 기가 막히게 소화하는 친구 등 각자의 자질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몸치에 박치인 나는 상쇠 다음인 꽹과리의 부쇠를 맡았는데 상쇠를 방해만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탈춤 불량품’이었지만 그래도 쓸 만한 구석이 하나는 있었는데 바로 대본을 만드는 일이었다. 전통 민속놀이 책을 참고하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언어화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노가바’(기존 곡에 가사만 바꾼 노래)를 만들기도 했는데 좀 청승맞은 구석이 있던 나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 맞춰 가사를 바꿨다.
“내 손 거쳐 만든 물건 백화점엔 가득해도/ 셋방살이 내 방에는 재고품도 하나 없네…”
4절까지 만들어 흥얼댄 이 노래는 나중 한국노동조합협의회가 엮은 노래책에 ‘노동자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81년께 원풍모방 옥상에서 진행된 탈춤반 공연 연습 장면. 필자는 1980년 12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돼 강제사직서를 써야 했던 탓에 이때 공연엔 참여하지 못했다. 필자 제공 |
탈춤반은 노동절, 명절, 노사협상, 체육대회, 부서 야유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하고 즉석에서 징 북 장구 꽹과리로 흥을 돋우기도 하며 거의 모든 행사에서 감초 구실을 했다. 1980년 5월13일 한국노총회관 점거 농성장에서는 어용 노총 쇄신과 노동 기본권 보장 촉구에 관한 대사를 만들어 신나게 춤췄는데 그 봄이 며칠 후 그리 처참히 무너질 줄은 몰랐다.
원풍 탈반의 소문이 나면서 외부 공연 요청도 제법 많아졌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증축 개관 기념행사, 가톨릭노동청년회 전국지도자대회, 한신대학교 등 크고 작은 내외부 공연이 16차례 넘게 이루어졌다. 특히 부산 조선방직쟁의(1952년) 과정을 극으로 만든 ‘조방쟁의’ 공연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82년, 원풍노조가 파괴당하고 우여곡절을 거쳐 83년 1월19일 해산을 결정했다. 해산식 날 “각자 현장을 찾아 새로운 씨앗이 되자” 하는 선언문 낭독 후 마지막으로 탈춤반이 춤을 추었고 강당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2019년 관객의 눈물은 그날의 회한이었다.
옛 대본을 살펴보다 그 시대의 바람이 지금도 별다르지 않음을 서글퍼하며 그때의 기원을 재생한다.
“유세차 경신년 3월10일, 노동절을 맞이하여 우리 노동자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이 길 저 길, 거리 귀신님, 원풍모방 지신님이여 이 자리 무사히 끝나도록 인도하시기를 비나이다. 또한 근로조건 개선하라 불타도록 외치다가 지금은 지하에 계신 전태일 귀신님, 생존권 찾으려고 싸우다 투구 쓴 몽둥이에 피 흘리며 죽은 김경숙 귀신님, 두루 이 조촐한 자리 함께하여 살피소서. 남영귀신, 해태귀신, 원풍귀신, 동일귀신, 청계피복귀신, 백만 노동자 수호하는 귀신님들이시여, 이 나라의 노동자들이 참된 권리 찾아내고 노동인권 보장받아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하소서.
옷 바꿔 입은 가짜 귀신, 몽둥이에 투구 귀신, 카메라든 정보 귀신, 귀족노조 어용 귀신, 노동삼권 거머쥐고 노동자를 깔보는 귀신, 물가폭등 귀신, 혼란 온다 떠들면서 계엄령 잡은 귀신, 껍데기뿐인 수출증대 성장 귀신 썩썩 물러나게 하여 주시옵고, 노동삼권 돌려받고 보위법이 철폐되고 해고자가 복직되고 어용 귀족 없어지고 생계비를 보장받고 감옥이 없어지는 평등하고 밝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두루 살피시옵기를 비나이다. 상향.” (1980년 3·10 노동절 탈춤 공연 제문)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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