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
강지나 | 교사·‘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저자
현서(가명)는 운동을 좋아했고 공부든, 청소든 흔쾌히 했다. 어느 날 주말 한강에 가서 친구들과 재밌게 놀았다고 말했다. 온몸으로 유쾌한 경험을 음미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그 기운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학급 행사를 할 땐 친구들과 계획을 세우고 협의하는 과정에 공을 들였다. 때로는 독립적으로 뭔가에 몰두할 때도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앞으론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로 수학 문제를 열심히 풀었는데, 어떤 날은 종례가 끝나고 친구들이 청소하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집중했다. 성적이 오르진 않았지만 몇달간 공부에 열중한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현서 같은 친구를 ‘자아정체감’이 잘 형성된 청소년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정체감이란 내가 누구인가라는 총체적 느낌이자 인식이다. 청소년은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이에 대한 주위의 평가에 민감해진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신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간다. 청소년기가 중요한 이유는 능력이나 성향과 상관없이 자기 본연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자아’란 고정되어 있고 타인과 구별되는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역사에 흥미가 있고 외향적인 성격이며 떡볶이를 좋아한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규정짓는다. 게다가 학교는 학업 성취를 두고 비교와 우열 가름이 횡행하는 곳이다. 학생들은 또래들과 모든 활동에서 비교당하거나 스스로 비교하고, 거기서 만족이나 열등감을 얻는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규정이나 남보다 나은지 못한지는 자아정체감 형성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자아가 고유한 실체라는 인식은 생존을 위해 인간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최근 물리학과 뇌과학은 자아를 인식하는 구조에 대해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나’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광대하고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이며, 각각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 기억, 감정, 사회적 맥락, 타인과의 상호작용 모두가 나를 구성한다”고 했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은 “뇌 안에 자아라고 인식하는 영역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자아는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고 경쟁하다가 결정되는, 민주적이고 다면적인 존재”라고 했다. 놀랍게도 이런 최신 이론은 불교와 인도철학, 도교의 오랜 가르침과도 상통한다. 불교와 인도철학에서는 ‘그물의 그물코’라는 은유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했고, 장자는 자아와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물아일체를 주장했다.
종합해보면, 자아정체감은 고유한 ‘나’라는 인식이 내가 체험하고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이며 이는 다양한 경험들의 연결망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청소년의 삶에 접목해보자. 청소년들은 학습 능력이나 단체생활 등 몇가지 장면에서 얻어지는 자기 모습을 자아로 인식하는 방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가족, 친구, 학교뿐 아니라 사건, 물질, 생명, 우주와의 연결망 안에서 파악되는 역동적 자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운동을 좋아하는 ‘나’에서 확장하여,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운동을 할 때 무엇을 경험하고 상호작용하는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현서는 승부와 상관없이 운동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친구들과 주고받는 에너지를 즐겼다.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는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아정체감을 얻으려면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집과 학교, 학원을 오가는 쳇바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등산이나 다이빙 같은 격한 활동을 해보고, 다른 환경의 사람을 만나보고, 낯선 상황에도 적응해봐야 한다. 실제로 청소년들에게 해보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여행, 아르바이트, 봉사활동 등을 꼽는다. 청소년들은 생명 본연의 모습으로, 주위 환경과 변화에 반응하고, 능동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탐색하고 싶은 디엔에이(DNA)를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겨울밤 밝히는 민주주의 불빛 ▶스토리 보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