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충무로 움직이는 '원천 소스'
수출 비중 일본 49.5%·북미 21%
불법 유통·AI 저작권이 '지속 가능성' 위협
수출 비중 일본 49.5%·북미 21%
불법 유통·AI 저작권이 '지속 가능성' 위협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 자비츠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뉴욕 코믹콘(NYCC) 2025'에서 웹툰 엔터테인먼트 전시 부스가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2~3년간 한국 콘텐츠 산업의 '심장'은 바뀌었다. 과거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가벼운 '스낵 컬처'로 분류되던 웹툰이 드라마, 영화, 게임을 아우르는 핵심 지식재산(IP)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 글로벌 OTT와 충무로 자본을 움직이는 강력한 '원천 소스'로 부상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달 31일 발간한 '2025 웹툰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웹툰 산업 매출액은 약 2조2856억원이다. 전년(약 2조1890억원)보다 약 4.4% 증가한 수치로, 폭발적이던 성장세는 다소 완만해졌으나 시장 규모가 2조원대에 안착하며 산업이 성숙기에 진입했음을 입증했다.
전종섭 콘진원 데이터정책팀 책임연구원은 "전반적인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폭발적인 외형 성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흐름을 보였다"라며 "웹툰 IP가 가진 산업적 확장성과 부가가치 창출 능력은 꾸준히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8년간 웹툰산업 규모 |
'원 소스 멀티유즈'의 핵…넷플릭스·충무로의 '믿을 구석'
최근 글로벌 OTT와 극장가를 견인한 흥행작의 상당수는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특히 검증된 팬덤과 방대한 스토리라인을 보유한 웹툰은 영상화 과정에서 흥행 리스크를 낮추는 확실한 담보로 통한다.
산업적 위상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웹툰 IP를 활용한 2차 저작물 매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분야가 '드라마(38.3%)'였다. '캐릭터 및 굿즈(18.4%)'와 '애니메이션(10.7%)'은 그 뒤를 이었다. 이는 웹툰이 단순 콘텐츠를 넘어, 영상과 실물 경제를 아우르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외연을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웹툰 사업체들의 움직임도 이를 뒷받침한다. 가장 많이 진출한 신규 사업이 '자사 IP를 활용한 2차 저작물 제작(24.3%)'이었다. 글로벌 히트작 '나 혼자만 레벨업'의 사례처럼, 인기 웹툰 하나가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확장하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슈퍼 IP 생태계'가 이미 업계의 핵심 생존 전략으로 정착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몰에 열린 '2025 월드 웹툰 페스티벌'에서 관람객들이 팝업스토어 전시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
이재식 씨엔씨 레볼루션 대표는 "과거 영화·드라마 제작사들이 웹툰 판권을 구매해 시나리오 소재로만 썼다면, 지금은 기획 초기 단계부터 웹툰 작가, 플랫폼과 수익을 공유하는 'IP 동맹' 체제로 시장 판도가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이태원 클라쓰'는 영상의 성공이 곧 원작의 매출 폭증으로 이어지는 '흥행 선순환'을 입증한 결정적 계기였다"며 "최근에는 웹툰사가 단순 원작 제공자를 넘어 직접 제작에 뛰어들거나 마케팅을 공조하는 등 영상 업계와의 결속력이 전례 없이 강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네이버·카카오, '망가' 본고장 넘어 북미·유럽으로
플랫폼 기업들의 글로벌 영토 확장도 본궤도에 올랐다. 2024년 나스닥 상장으로 글로벌 기업 입지를 굳힌 네이버웹툰(웹툰 엔터테인먼트)과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북미와 일본, 유럽을 거점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실태조사에서 확인된 K웹툰의 수출 권역별 비중은 '만화 강국' 일본이 49.5%로 절반에 육박했고, 북미가 21.0%로 그 뒤를 이었다. 이는 국내 플랫폼들이 일본의 '망가', 미국의 '코믹스' 시장 틈새를 파고들어,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세로 스크롤 방식의 '한국형 웹툰 문법'을 글로벌 표준으로 이식하는 데 성공했음을 시사한다. 단순 번역 유통을 넘어 현지 작가를 발굴하는 '크로스 보더(Cross-border)'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2024년 웹툰 해외 수출 국가별 비중 |
'수조 원대' 불법 유통·AI 딜레마…화려한 성장의 그늘
그러나 산업의 고도화 이면에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산적해 있다. 덩치는 커졌지만 내실을 위협하는 구조적 리스크가 여전하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기생충처럼 자라난 불법 유통 시장이다. 실태조사에서 웹툰 사업체들은 사업 추진 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불법 복제 사이트(35.7%)'를 꼽았다. 업계 추산 연간 1조원대에 달하는 불법 유통 피해는 창작자의 수익을 잠식하고 플랫폼의 재투자를 위축시키는 치명적인 요인이다. 정부의 단속에도 서버를 해외에 두는 등 수법이 교묘해져 실효성 있는 제재가 어렵다는 현장의 호소가 나온다.
기술적 과도기에 따른 혼란도 감지된다.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AI 기술 도입을 두고 업계의 셈법이 복잡하다. 대다수가 작업 시간 단축 및 효율 향상을 기대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저작권 침해 논란과 창작의 고유성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적극적인 도입을 주저하는 '탐색기'가 길어지고 있다.
이재식 대표는 "기술적 퀄리티는 높아졌지만, 작가 고유의 화풍과 AI 결과물 사이에 미묘한 이질감이 있어 기존 공정에 즉각 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배경 작업 등에서 알게 모르게 활용하는 사례는 늘고 있지만, 저작권 이슈 등으로 인해 대외적으로 AI 사용을 공론화하거나 전면 도입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운 단계"라고 덧붙였다.
한국만화가협회와 한국웹툰작가협회가 지난해 8월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불법 웹툰 사이트 운영자의 국내 송환 촉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2026년 키워드는 '내실'과 '수익화'…"슈퍼 IP가 살길"
이러한 안팎의 도전에 직면한 업계는 2026년을 체질 개선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단순한 외형 성장을 넘어, 수익 모델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질적 도약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핵심 로드맵은 플랫폼의 스튜디오화(化)다. 단순히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중개 역할을 넘어, 플랫폼이 직접 IP를 발굴하고 영상·게임·굿즈 제작까지 주도하는 '토털 IP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전략이다. 네이버웹툰이 나스닥 상장 이후 북미 현지 IP 발굴에 공을 들이고, 카카오가 영상 제작 역량을 내재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치 '마블'처럼 하나의 슈퍼 IP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무한 확장하는 '프랜차이즈 비즈니스'가 올해 업계의 새로운 표준이 될 전망이다.
단순 번역 수출을 넘어선 '초(超) 현지화' 전략도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웹툰 제작 시스템만 이식하고, 스토리와 그림은 현지 정서에 맞는 현지 작가가 맡는 방식이다. 이는 K웹툰을 넘어선 글로벌 웹툰 생태계를 구축해 지속 가능한 수익원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전종섭 책임연구원은 "웹툰 산업은 이제 단순 유통망 확장을 넘어, IP 밸류체인 전체를 장악하는 '고도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러한 청사진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슈퍼 IP 발굴 노력과 함께, 불법 유통 근절을 위한 강력한 규제와 AI 저작권 합의 등 '정책적 리더십'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제언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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