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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의 디지털]시대와 불화하는 제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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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의 디지털]시대와 불화하는 제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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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는 2022년 11월30일 나왔다. 나온 지 두 달 만에 사용자가 2억명을 넘었다.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AI)을 제대로 써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챗GPT가 나타나기 3년6개월쯤 전인 2019년 5월에 그것을 예견하기만 했으면 된다. 일이 대단히 순조롭게 된다면 3년6개월 뒤 챗GPT가 나올 때 딱 맞춰 쓸 수 있다. 안전하게 하자면 2016년쯤에 예견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300억원이 넘어가는 사업은 최소 3년6개월, 길면 6년6개월이 지나야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조달 과정이 그만큼 길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선 ISP(Information Strategy Planning, 정보화전략계획)와 같은 사전계획 검토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 예산을 확보하는 데 3~6개월이 들어간다. 승인이 되면 6~12개월 동안 정보화전략계획을 수립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1년에서 1년6개월 동안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친다. 그러고 나면 다시 반년에서 1년 동안 본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그게 끝나면 비로소 업체를 선정하는 입찰을 3~6개월 진행한다. 그러고 나서야 개발이 시작되는데, 이것도 최소한 1년이 걸린다. 문제는 3년6개월 전의 기획으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낡은 이야기가 돼 버리기 때문이다. 챗GPT가 나오기도 전인 걸.

지금의 조달체계·교육과정 등은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중앙집권적 관료체계를 버리고
자율성이 창발할 수 있도록 해야

국가교육과정은 대한민국 정부(교육부)가 초·중·고등학교 교육의 목표와 내용, 운영 기준 등을 국가 수준에서 정해 고시한 기본교육계획이다. 말하자면 교육의 헌법과도 같다. 현장의 교사들은, 형식은 헌법이나 내용은 조례나 시행규칙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교육과정이 아주 꼼꼼하게 설계돼 교사의 재량이 발휘될 공간이 좁다는 것이다. 7~10년에 한 번씩 바꾼다. 2000년대 들어 수시로 개정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최근 사례를 보면 2009년, 2015년, 2022년에 개정했다.

지금 교육과정은 2022년 개정 교육과정이다. 챗GPT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교육과정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학년별로 순차적으로 적용된다. 2024년에 초등학교 1~2학년부터 적용을 시작해 2025년에 초 3~4, 중 1, 고 1까지 확대 적용하고, 올해 초 1~6 전체, 중 1~2, 고 1~2 학생들에게 적용한다. 중3과 고3은 기존의 2015 개정 교육과정 적용 대상이다. 다시 말해 중3과 고3은 10년 전에 정한 교육과정으로 배운다는 것이다. 이게 맞나? 세상이 대한민국 교육부를 위해 웅크리고 있다가, 7년에 한 번씩, 10년에 한 번씩만 딱딱 바뀌나? 대한민국의 중3, 고3은 무슨 죄를 지어서 10년 전에 정한 교육과정을 배워야 하나?

인공지능은 마치 증기기관과 같다. 증기기관이 바꾼 건 공장만이 아니다. 부의 원천이 토지에서 자본과 기계로 바뀌었다. 농민이 도시 노동자로 옷을 갈아입었고, 귀족 대신 자본가 계급이 등장했다. 왕정은 입헌군주제가 아니면 민주정이 됐다. 왕의 질서가 시민의 질서가 됐다.

옛 질서들이 시대의 변화에 순응했을까? 업종별 장인조합 길드는 오랫동안 방적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에 저항했다. 루이 16세는 18세기 말의 프랑스를 보지 못했다. 세금 부담은 평민과 부르주아에게 집중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절대왕정을 고수하고, 신분제를 강화하며, 면세특권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왕정은 폐지됐고, 국왕은 처형됐다.


AI의 시대다. 기술의 변화는 갈수록 속도를 더한다. 지난 기술의 어깨 위에서 다음 기술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조달체계, 지금의 교육과정은 말하자면 옛 질서다. 길드처럼, 귀족정처럼, 면세특권처럼 시대와 불화한다.

망치의 존재 이유는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것이다. 문제가 ‘못’이 아닐 때 우리는 톱과 드라이버를 꺼내들 수 있어야 한다. 조달의 성공은 엄밀한 조달 기준을 세우고 부정을 방지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교육과정의 임무는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잘 준비된 어른으로서 세상으로 나설 때 완성된다. 나머지는 다 망치요, 톱이며 드라이버일 뿐이다.

자율성이 창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중앙집권적 관료체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다. 불신의 구조를 버려야 한다. 가장 귀한 자본은 언제나 신뢰이다. 중진국과 선진국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 선진국만 쓸 수 있는 레어 아이템 신뢰 자본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바꾸지 않으면 바뀜을 당한다. 길드도, 루이 16세도 이겨내지 못했다.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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