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현 셰프. 사진|천상현 |
[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천상현 셰프의 요리 인생은 유독 긴 시간, 한 공간에 머물러 있다. 1998년부터 2018년까지. 그는 20년 동안 청와대의 식탁을 책임졌다. 다섯 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에도 주방은 그의 자리였다.
2018년 청와대를 나왔다. 이후 서울 종로에서 매장을을 운영하며 새로운 일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낯선 무대에 섰다. ‘흑백요리사2’였다.
대통령의 식탁을 책임졌던 셰프가 서바이벌 예능에 출연했다는 점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시즌1 당시 이미 제작진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최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스포츠서울과 만난 천상현은 “시즌1 제안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병이 재발했고, 수술 일정이 잡히면서 출연은 불가피하게 무산됐다”고 말했다.
“암 수술 초기 단계에 있었어요. 몸 상태가 경연을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지금은 몸 상태가 회복됐죠. 다시 제의가 왔고, 이번에는 출연을 결심했어요. 약을 복용하며 컨디션을 관리했고, 장시간 촬영에 대비해 식단도 직접 챙겼습니다.”
천상현에게 ‘흑백요리사2’는 도전이 아니라 확인의 과정이었다. 오랜 시간 권력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요리를 해온 자신이, 다시 요리사 개인으로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점검하는 자리였다.
“경연 형식에 대한 부담도 있었죠. 젊은 셰프들의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다가왔어요. 날아다니는 것 같았죠. 저도 그 나이대에는 그랬던 시절이 있었음을 떠올렸어요.”
경연에 임하며 세운 목표는 명확했다. 우승이 아니었다. 1회전을 넘는 것, 그리고 ‘창피만 당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흑과 백의 구분을 떠나, 각자의 방식으로 요리를 해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인상 깊었다.
“요리를 100명이 동시에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경쟁이기도 했지만, 난다 긴다 하는 셰프들이 모인 하나의 향연 같았어요.”
천상현. 사진ㅣ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즌2 |
그에게 가장 깊게 남은 장면은 사부 후덕죽과 같은 무대에 섰을 때였다. 후덕죽은 과거 천상현을 청와대에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식탁으로 이어진 그의 요리 인생에는 늘 사부의 그림자가 있었다. 같은 백수저로 대기실을 함께 쓰고, 같은 팀으로 요리를 하다 결국 1대1 데스매치로 맞붙어야 했다. 스승과 제자 중 한 명이 반드시 떨어져야 하는 구조였다. 요리보다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지고 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경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사부님이 올라가셔서 진심으로 기뻤어요.”
방송 이후, 천상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겼다. ‘흑백요리사2’의 참가자라는 현재보다, 그가 지나온 시간이 다시 호명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2018년까지 20년간 청와대의 식탁을 책임졌던 이력이다. 정치적 평가를 넘어, 권력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매일의 식사를 담당했던 요리사의 삶 그 자체에 관심이 쏠렸다.
아침·점심·저녁, 하루 세 끼를 책임지는 일은 단순히 잘 만든 음식을 내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정 일정이 빽빽한 날, 해외 순방을 앞둔 시기, 컨디션이 떨어진 날의 식탁은 달라야 했다.
대통령의 선호 음식과 소화 상태, 그날의 일정까지 종합해 메뉴를 조율했다. 가장 우선에 둔 것은 안전과 제철 식재료였다. 눈으로, 기계로, 두 번 세 번 검증한 재료만 식탁에 올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중식과 산낙지, 홍어, 매운탕처럼 비교적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셨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파전과 해장국, 막회처럼 소탈한 메뉴를 좋아하셨죠. 이명박 대통령은 음식 남기는 걸 유독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늘 양을 조금만 달라고 하셨고, 간장 비빔밥이나 바비큐처럼 단순한 메뉴를 선호하셨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부분의 음식을 고르게 드셨어요. 문재인 대통령은 해장국을 즐기셨고, 특히 메밀소바를 냉면처럼 말아 드시는 방식을 좋아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시선은 다음 세대를 향해 있다. 새로운 사업보다는 후배 양성이다. 작은 요리전문학원을 열어,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배운 것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잘 나가는 셰프가 아니어도 좋고, 방송에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주방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식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하죠. 나중에 저 같은 제자가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요리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khd998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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