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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결심이요? ‘벽돌책’ 격파입니다”

조선일보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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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결심이요? ‘벽돌책’ 격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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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베개·무기로 불리던
두꺼운 책 도전 열풍
직장인 박지혜(38)씨는 지난 1일부터 ‘코스모스’를 읽기 시작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719쪽에 달한다. 박씨는 이 책을 읽은 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784쪽)에 도전할 계획이다. 두꺼운 책은 반도 읽지 못하고 덮기 일쑤였다는 그는 지난달 독서 모임에서 ‘사피엔스’(636쪽)를 완독한 뒤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벽돌책 한 권을 끝까지 읽고 나니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뿌듯했다”며 “올해 목표를 벽돌책 다섯 권 독파로 정했다”고 했다.

‘벽돌책’ 14권을 쌓자 높이가 성인 무릎을 훌쩍 넘었다. 사진 속 책들은 범접하기 쉽지 않은 두께와 무게에도 스테디셀러로 꼽혀 왔다. 최근 벽돌책 독파 챌린지에 나선 이들이 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벽돌책’ 14권을 쌓자 높이가 성인 무릎을 훌쩍 넘었다. 사진 속 책들은 범접하기 쉽지 않은 두께와 무게에도 스테디셀러로 꼽혀 왔다. 최근 벽돌책 독파 챌린지에 나선 이들이 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벽돌책’은 벽돌처럼 두껍고 무거운 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통상 500쪽 이상인 책을 뜻하는데, 1000쪽이 훌쩍 넘는 대작도 적지 않다. 베개로 써도 될 만큼 두껍고, 무기로도 쓸 수 있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시대를 관통하는 장편·대하소설, 사상·역사·문명을 다룬 인문·사회 고전, 자연과학의 큰 질문을 다룬 과학·지식 교양서가 주를 이루는데, 훌륭한 내용에도 너무 두꺼워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들어 벽돌책 읽기에 도전하는 이가 늘고 있다. 필독서나 추천 도서 목록에 자주 오르는 데다, 이 정도는 읽어야 ‘책 좀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어서다. 두꺼운 책 한 권을 끝냈다는 사실이 눈에 보이는 성취로 남는다는 점도 동기다. 짧고 빠른 ‘숏폼’ 영상이 판을 치면서, 오래 집중하는 경험에 대한 갈증이 커진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직장인 원모(40)씨는 최근 ‘헨리 키신저의 외교’(928쪽)를 완독했다. 2㎏에 육박하는 책을 ‘반려책’인 양 들고 다니며 꾸준히 책을 펼쳤다. 그는 “방대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홍수 속에서 무릎을 치게 하는 문장을 발견할 때 지적 희열을 느꼈다”며 “달리기를 하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달릴 때 느끼는 쾌감)’를 경험하듯, ‘리더스 하이’를 느낀 것 같다”고 했다. 회사원 한은정(33)씨는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병렬 독서 방식으로 벽돌책을 읽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632쪽) ‘서양미술사’(688쪽) ‘불안의 서’(808쪽) 등에 도전했다. 그는 “추천 도서 목록에 늘 있던 책들이라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왔다”며 “그때그때 읽히는 책을 골라 조금씩 읽고 있다”고 했다.

소셜미디어에선 ‘벽돌책 챌린지’가 유행이다. 읽고 있는 책의 사진을 올리거나, 인상 깊은 대목을 발췌해 공유하는 방식이다. ‘벽돌책’이란 해시태그(#)를 단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1만건이 넘는다. 새해 읽을 벽돌책을 책등이 보이게 쌓아 놓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이들도 많다. 출판사와 서점, 도서관도 이런 흐름에 발맞추고 있다. ‘벽돌책 전문 출판사’로 통하는 글항아리는 최근 8권짜리 ‘정사 삼국지’를 출간했다. 도합 4928쪽에 달한다. 민음사는 지난가을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1·2권 1416쪽)를 8주간 함께 읽는 벽돌책 챌린지를 열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은 ‘새해의 도전 벽돌책’이란 이벤트를 진행 중인데, 책을 ‘출간 1년 이내 따끈 벽돌’ ‘벽돌 스테디셀러’ 등으로 분류해 소개했다. 스테디셀러에는 ‘총, 균, 쇠’(784쪽) ‘축의 시대’(740쪽) 등이 이름을 올렸다. 교보문고도 내달 ‘도전, 벽돌책 깨기!’ 이벤트를 열 예정이다. 대전 유성도서관은 올해부터 벽돌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성인 동호회인 ‘벽돌책 독파단’을 운영한다. 첫 책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창조적 시선’(1027쪽)이다. 서울도서관을 비롯해 울산 월봉도서관, 전남 광양중마도서관 등이 지난해 벽돌책 읽는 모임을 운영했다.

벽돌책에 대한 관심은 실제 판매로도 이어진다. 한재국 교보문고 MD는 “도서 시장이 위축되고 있지만 벽돌책 매출 규모는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며 “검증된 도서가 많아 고급 독자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꾸준하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서도 벽돌책의 판매 흐름은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단기간에 폭발적인 흥행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해마다 꾸준히 판매되는 ‘실패하지 않는 책’이 많다는 것이다. 본지가 교보문고에 의뢰해 최근 5년간 판매된 1000쪽 이상 ‘벽돌책’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단행본 1권을 기준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삐뽀삐뽀 119 소아과’(1120쪽)였다. 2위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1156쪽), 3위는 ‘창조적 시선’이었다. ‘나의 투쟁’(1151쪽)이 4위, ‘신곡’(1088쪽)이 5위, ‘국부론’(1120쪽)이 6위를 차지했다.(학습서·사전 제외)


벽돌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재국 MD는 “부담감을 버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매일 30분씩 혹은 30쪽씩 읽는 ‘꾸준함’을 목표로 해야 한다”며 “목차를 잘 보고 관심이 덜 가는 부분은 과감하게 넘어가도 된다”고 했다. 월간 책방 대표인 김형준 작가도 비슷한 팁을 제시했다. ①하루 20쪽 안팎으로 분량을 잘게 나눠라 ②목차와 서문을 꼼꼼히 읽어라 ③어려운 부분은 일단 넘어가라 ④읽기 모임에 참여하라 등이다. AI 챗봇의 도움을 받는 독자도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700쪽) ‘안나 카레니나’(1750쪽) 등을 완독한 회사원 김모(29)씨는 “러시아 문학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어려워 헤매곤 했는데, AI에 인물 관계도를 만들어 달라고 한 뒤 책을 시작하니 한결 수월해졌다”고 했다.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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