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연합뉴스 언론사 이미지

"마오쩌둥 보다 돋보이면 안 된다"…살얼음판 걷듯 산 인생

연합뉴스 송광호
원문보기

"마오쩌둥 보다 돋보이면 안 된다"…살얼음판 걷듯 산 인생

속보
김건희특검, '매관매직 의혹' 김상민 전 검사 징역 6년 구형
의심 많은 마오쩌둥 밑에서 27년간 총리…평전 '저우언라이'
암 투병 중 마지막 공개석상에 선 저우언라이 [아르테 제공. Imaginechina Limited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암 투병 중 마지막 공개석상에 선 저우언라이
[아르테 제공. Imaginechina Limited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사망하자 톈안먼 광장에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 27년간 총리로 재임한 '영원한 총리'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추도식에는 그의 후계자 덩샤오핑(鄧小平)을 포함해 베이징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여했으나 일인자 마오쩌둥(毛澤東) 주석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같은 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수많은 중국인에게 존경받고 있다. 그는 대체로 20세기 동안 중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는 장기적인 과정을 시작한 창시자 혹은 설계자라는 긍정적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에 충성심을 보였다거나 정치적 목표보단 보신을 우선시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마오쩌둥의 충실한 개"(역사가 프랑크 디쾨터)라는 평가와 함께 "위선적", "이기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1921년 봄 공산당 입당 후 단 한 번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다. 이는 마오쩌둥조차 달성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침 많은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그는 1등은 되지 못했지만 늘 2등은 유지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아르테 제공. CPA Media Pte. Ltd.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아르테 제공. CPA Media Pte. Ltd.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최근 출간된 '저우언라이'(아르테)는 저우언라이의 삶을 그린 평전이다. 중국 현대사 연구의 석학 천젠 코넬대 명예교수가 그의 태생부터 죽음까지를 1천쪽 넘는 분량으로 다뤘다. 25년간 저우언라이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이다.

저우언라이는 어린 시절부터 출중했다. 그는 톈진에 있는 난카이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 가 공산당의 주요 간부가 됐다. 국공합작 시절에는 황푸군관학교에서 정치부 주임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당시 교장은 국민당의 이인자 장제스(蔣介石)였다. 장제스도 성실하고 꼼꼼한 저우언라이를 신뢰했다. 그러나 쑨원(孫文)의 사망으로 국공합작이 깨지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하이로 이동해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정보 총괄자로 활동했다.

1936년 경. 말을 탄 저우언라이[아르테제공. Sovfoto / Universal Images Group via Getty Images. 재판매 및 DB금지]

1936년 경. 말을 탄 저우언라이
[아르테제공. Sovfoto / Universal Images Group via Getty Images. 재판매 및 DB금지]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서 행정 권력과 정보연계망을 제도화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탁월한 행정 활동으로 당원들의 지지는 물론, 세계 공산 세력을 진두지휘한 스탈린의 주목을 받았다. 대장정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마오쩌둥보다 당내 지위는 물론 지지기반도 넓었다. 마오쩌둥은 홍구(공산당 장악지역)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독단적인 데다가 잔혹해 악명도 높았다.

"사람으로서 마오쩌둥의 가장 큰 문제는 매우 야심 차고, 의심이 많으며, 주관적이고,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당 및 군대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길 원하지 않았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아르테제공. Historic Collection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
[아르테제공. Historic Collection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공격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면서 적절히 그를 통제하려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야생마 같은 인물이었다. 당내에선 마오쩌둥을 내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애초 이를 주도한 이도 저우언라이였지만, 마오쩌둥이 공산당 내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라 그는 판단했다. "군사 천재"인 그 없이, 장제스에게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만 한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가 마오쩌둥처럼 비범하게 야심 차고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했다. 또한 그의 모든 동지중에서 야망과 책략에서 장제스와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마오쩌둥임을 알았다. 장제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을 그의 편에 두어야 했다."

오른쪽부터 저우언라이, 주더, 마오쩌둥[아르테 제공. World History Archive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오른쪽부터 저우언라이, 주더, 마오쩌둥
[아르테 제공. World History Archive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대장정과 장제스와의 잇따른 전투에서 마오쩌둥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고, 결국 일인자의 자리에 올라 중원을 통일했다. 저우언라이는 이인자로 뒤처졌다. 마오쩌둥은 뒤끝이 있는 사람이었고, 홍구에서 저우언라이에게 당한 패배와 모욕을 평생 잊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27년간 총리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렸지만, 여러 차례의 자아비판과 모욕, 숙청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는 극도로 조심하면서 의심 많은 마오쩌둥의 시선을 견뎠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오쩌둥보다 돋보여선 안 됐다…. 만약 그가 마오쩌둥의 지도력과 정책 노선에서 벗어난다면, 언제든지 마오쩌둥에게 공격받거나 심지어 정치적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이 두려움이 생애 마지막 날까지 저우언라이를 괴롭힐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왼쪽부터 장칭, 저우언라이, 린뱌오, 마오쩌둥[아르테 제공.  World History Archive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문화대혁명 당시. 왼쪽부터 장칭, 저우언라이, 린뱌오, 마오쩌둥
[아르테 제공. World History Archive / Alamy Stock Photo. 재판매 및 DB금지]


고령의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끝까지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다. 류사오치(劉少奇), 린뱌오(林彪), 왕훙원(王洪文), 덩샤오핑, 화궈펑(華國鋒) 등을 후계자로 내세웠고, 또한 이들을 축출하거나 재등용하면서 교묘하게 권력을 운영했지만, 저우언라이만은 평생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만큼은 끝내 내치지 못했다. 그가 없이는 정부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행정의 달인이었다.

저우언라이가 죽고, 마오쩌둥도 곧이어 사망하면서 저우언라이의 후계자 덩샤오핑이 권력을 차지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혁명적 노선을 폐지하고, 저우언라이의 실용주의와 현대화 전략을 계승했다. 죽기 전 저우언라이는 제4차 전국인민대회 연설에서 중국이 "산업, 농업, 국방, 과학기술 네 가지 영역에서 현대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덩샤오핑은 이를 따랐다.


이성현 옮김. 1천68쪽

[아르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아르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이성현 옮김. 1068쪽.

buff27@yna.co.kr

buff27@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