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44년 1월 16일 40세
1944년 1월 16일 40세
이육사 |
2026년 올해는 붉은 말의 해 병오년이다. 96년 전인 1930년은 흰 말의 해 경오년이었다. 시인 이육사(1904~1944)는 그해 1월 3일 자 조선일보에 시 ‘말’을 실었다. 이활(李活)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첫 시다. 말의 해를 맞아 ‘말(馬)의 족보와 종속(種屬)과 전설’이라는 특집 기사 끄트머리에 딸린 2연짜리 짧은 시였다.
흣트러진 갈기
후주군한 눈
밤송이 가튼 털
오! 먼길에 지친 말
채죽에 지친 말이여!
X
수굿한 목통
축처-진 꼬리
서리에 번적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헷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힌 말이여!
(1930년 1월 3일 자 7면)
이육사의 첫 시 '말'. 1930년 1월 3일자 7면. |
이육사 '노신 추도문'. 1932년 10월 23일자 석간 5면. |
이육사는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가 1934년 다시 조선일보 기자가 된다. 그해 중국에서 귀국하다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조선일보 대구 특파원이 되어 부임 도중에 본정(本町·현 충무로) 경찰서에 검거되었다”(1935년 재판 기록)고 밝혔다.
1936년 10월 중국 문호 노신(魯迅)이 사망했을 때는 조선일보에 ‘노신 추도문’을 5회(1936년 10월 23~29일)에 걸쳐 연재했다. 이육사는 1932년 6월 초 중국에서 노신을 만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때 노신(魯迅)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 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햇드란 말을 듯고 외국의 선배 압히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 공손(恭遜)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엿다.”(1932년 10월 23일 자 석간 5면)
1937년 10월 31일자 5면. |
식민지 시기엔 넷째 원조가 더 유명했다. 그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을 2년 연속으로 당선시킨 문사였다. 1930년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며 문학 평론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엔 육사를 ‘이원조의 중형(仲兄·둘째 형)’으로 소개할 정도였다.
2022년 2월 3일자 A22면. |
다섯째 원창은 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 때까지 인천 지국 기자로 활동했다. 폐간호인 1940년 8월 11일 자에 실린 지방 특파원 방담 기사에서 이원창은 3형제가 조선일보에서 일한 데 대해 이렇게 자부했다. “기자 생활 5년인데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광복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조봉암의 비서를 지냈다.
2004년 8월 2일자 A3면. |
이육사는 해방 1년 7개월 전인 1944년 1월 16일 중국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2004년 탄신 100주년, 순국 60주년을 맞아 이육사 문학관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생가 입구에 들어섰다. 외동딸 이름 ‘옥비(沃非)’는 이육사가 지었다. “간디 같은 욕심 없는 사람이 되라는 뜻”(2004년 8월 2일 자 A3면)이라고 이옥비씨가 밝혔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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