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문서는 평균적인 문해력을 가진 시민이 별다른 노력 없이 한번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쉬운 언어는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게티이미지뱅크 |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지난 칼럼에서 쉬운 말 쓰기는 ‘바른 말 고운 말’ 캠페인이 아니라, 시민적 권리라고 했었다. 공공 문서는 평균적인 문해력을 가진 시민이 별다른 노력 없이 한번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법과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면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없다. 쉬운 언어는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이 절절한 철학이 한국만 오면 쪼그라든다. 한국에도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이 있다. ‘공공기관은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을 써야 하며, 장관은 이를 매년 평가하여 공개해야 한다’고 명시한다(제14조). 겉보기엔 멀쩡한데 실상은 어떨까.
문화체육관광부는 매년 공공언어 실태를 평가해 발표한다.(만세! 수고 많으시다!) 한데 그 결과물을 뜯어보면 기가 찬다. 외국어나 한자어를 얼마나 썼는지 점수를 매겨 ‘우수’ ‘보통’ ‘미흡’ 등으로 등급을 매길 뿐이다. 1년 동안 공공기관에서 나온 공문서를 평가한 결과물이 고작 ‘기관별 등급표’가 담긴 두쪽짜리 파일 하나다. 뭐가 문제이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알려주는 오답 노트나 개선 사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정부의 공공언어 정책은 앙상하다 못해 민망하다. 이 두쪽짜리 성적표는 행정 편의주의의 전형이다. ‘법에 하라니까 우린 했다’는 식의 면피용 알리바이를 남기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뉴질랜드의 ‘알기 쉬운 언어법’은 ‘시민이 이해하지 못하면 법적 효력이 없다’고 못 박는다. 한국은 ‘미흡’ 등급을 받아도 ‘쩝’ 하며 머리 한번 긁적이면 그만이다. 잠시 창피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공공언어는 채점의 대상이 아니다. 구속력 없는 평가 대신 시민의 언어적 권리를 보장하는 무거운 ‘의무’를 지워야 한다. ‘국민주권’의 시대는 쉬운 말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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