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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공단 500억대 ‘담배 소송’ 2심도 패소

조선일보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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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공단 500억대 ‘담배 소송’ 2심도 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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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 “보험급여 지출은 손해 아냐”
이사장 “과학과 법의 괴리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서 직원이 담배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서 직원이 담배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건강보험공단이 국내외 주요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낸 이른바 ‘담배 소송’의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6부(재판장 박해빈)는 15일 건보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을 상대로 낸 533억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건보공단의 보험 급여 지출은 손해배상 청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건보공단의 항소를 기각했다.

건보공단은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흡연 폐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고 건강보험 재정 누수를 막겠다는 취지로 2014년 소송을 냈다. 533억원은 30년 넘게 20갑년 이상으로 흡연한 폐암·후두암 환자 3465명에게 건보공단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지급한 급여비다.

건보공단은 담배 회사들이 유해 성분인 ‘타르’와 중독을 일으키는 ‘니코틴’ 등을 줄이는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담배를 생산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저타르’ ‘저니코틴’ 등 소비자를 속이는 광고 문구로 흡연을 조장한 것이 불법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에 이어 항소심도 담배 회사들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먼저 “건보공단이 지급한 보험 급여는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른 보험자의 의무 이행에 불과하다”며 “그 자체로 공단의 보호 법익이 침해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건보공단의 보험 급여 지출은 ‘손해’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담배 회사들이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니코틴을 어느 수준까지 낮추면 안전하다고 일반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학계의 확립된 기준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흡연자마다 니코틴 흡수율과 흡연 습관이 달라 ‘안전한 함량 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천공(미세 구멍) 필터’가 이른바 ‘보상 흡연’을 유발해 오히려 더 많은 연기를 흡입하게 만든다는 건보공단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필터는 기본적으로 유해 물질 흡입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설계”라며 “천공 없는 단순 필터가 더 안전한 대체 방안이라고 일반화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건보공단은 담배 회사가 경고 문구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아 1960~1970년대 흡연자들이 담배의 중독성과 위험성을 알지 못한 채 흡연을 시작했다고도 했지만, 재판부는 1960년대 이후 신문 기사와 연구 자료 등을 근거로 “담배가 건강에 해롭고 중독성이 있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사회 전반에 알려져 왔다”고 했다.

건보공단은 1심 패소 이후 흡연과 암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대규모 의학·역학 자료를 추가로 제출했다. 흡연 외에 가족력·생활 습관 등 다른 발병 요인이 확인되지 않은 폐암 환자 1467명의 의무 기록 등을 제출했고, 작년에는 2004~2013년 민간 검진센터 수검자 13만6956명을 2020년까지 추적 관찰한 결과 ‘30년 이상 20갑년 이상’ 흡연자의 경우 비흡연자보다 폐암 발병률이 최대 55배가량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흡연과 암 발병 사이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도 달라지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역학적·통계적 상관관계만으로는 특정 개인의 질병 원인을 단정할 수 없다”며 “흡연 시기와 기간, 건강 상태, 생활 습관 등 개별 사정을 추가로 살펴야 한다”고 봤다. 이는 기존 대법원 판례의 입장이기도 하다.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직접 변론에 나섰던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이날 판결 선고 직후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담배 회사는 뺑소니범이라고 생각한다. 교통사고가 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사망했는데 운전자가 도망가 버린 것”이라며 “담배 회사들이 수많은 이익을 얻는 동안 피해 국민들은 오늘도 병실에서 아파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판결이 매우 아쉽지만 진리는 언젠가 인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보공단은 대법원에 상고할 방침이다.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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