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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자에게도 가닿는 헌법재판을 꿈꾸며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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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자에게도 가닿는 헌법재판을 꿈꾸며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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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회원들이 2022년 4월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민단체 회원들이 2022년 4월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차성안 |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94년 서울 중림동 산동네에 살던 가난한 노부부가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1인당 월 6만5천원의 1994년 생계보호기준이 헌법상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었다. 심리 끝에 헌법재판소는 대도시에 사는 2인 가구에 필요한 최저생계비가 월 38만원(1인당 19만원)이라고 인정했다. 38만원이 필요한데 25만원이 적은 13만원(6만5천원×2인)이 나오니 위헌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 같지만, 결론은 합헌이었다. ‘입법부, 행정부의 광범위한 재량’과 다른 급여, 사용료 감면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총괄기준설’로 빚어낸 마술이었다. 다른 급여로는 1인당 노인수당 월 1만5천원, 월동대책비 연 6만1천원, 월 3600원 상당 버스승차권 지급이, 감면으로는 가구당 상수도·하수도 기본사용료 각 월 2500원, 티브이(TV) 수신료 월 2500원, 전화사용료 월 6000원 면제가 제시되었다. 다 합산하면 6만866원(=1만5천원×2인+6만1천원/12개월×2인+3600원×2인+2500원×2개+2500원+6000원이다), 2인 가구 생활보호급여 13만원과 합치면 19만866원으로, 여전히 대도시 2인 가구 최저생계비 38만원보다 18만9134원이 적다. 그런데도 헌재는 헌법상 용인될 수 있는 재량의 범위를 명백히 일탈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했다. 청구인 심창섭 할아버지는 ‘다 합쳐도 필요한 최저생계비의 절반 수준이지만 합헌’이라는 논리를 이해하셨을까.



헌재에 한번 더 기회가 왔다. 중증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최옥란씨는 생계급여 26만원, 주거급여 2만3천원, 장애수당 4만5천원을 받았지만, 장애로 인한 치료비 20여만원, 임대료 16만원 등 월 60여만원의 생계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2001년 12월 최옥란씨는 생계급여를 정부에 반납한 후, 의료비·교통비 등 추가 지출이 필요한 장애인 가구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같은 최저생계비를 정한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혼 시 뺏긴 아들의 양육권 회복을 위해 받은 도움이 소득으로 간주되어 수급자에서 탈락한 최옥란씨는 음독자살로 사망한다. 하지만 그 뜻을 이은 헌법소원이 다시 제기된다. 2004년 헌재는 ‘총괄기준설’을 업그레이드하여 재활용한다. 청구인에게 실제 해당하는지 검토하지 않고 금액 제시도 없이, 장애 관련 다른 급여와 감면 등을 죽 나열한 후 재량을 명백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며 청구를 기각했다. 최옥란이 살아 위 결정을 받았다면 ‘총괄하여 보면 나는 최저생활을 보장받고 있구나’라며 납득했을까.



일본 최고재판소는 작년 6월, 빈곤자를 위한 생활보호비를 물가변동만을 고려하여 최대 10% 깎은 2013~2015년의 인하 처분을 재량권 일탈·남용을 이유로 취소하였다. 지난 10여년간 일본의 모든 생활보호대상자의 급여액을 재산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엄청난 결정이다. 광범위한 재량과 총괄기준설로 도피한 한국의 헌재와는 참 다른 행보이다. 독일 기본법에는 헌법상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10년 결정에서 해석론으로 국가에 대해 최저생활 보장을 요구할 기본권을 도출하였다. 이어 실업자를 위한 생계급여에서, ①아동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성인의 60%를 지급하는 것, ②특별한 상황에서 계속 발생하는 1회적이지 않은 특별한 수요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 모두 위헌이라고 판단하였다. 2019년에는 재취업 노력 등 자활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생계급여를 30% 넘게 삭감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도 나왔다. 최저생계 보장이 문제 되는 영역이므로, 오히려 공익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하더라도 그 수단과 정도가 목적에 걸맞아야 한다는 엄격한 ‘비례성 심사’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 헌재가 광범위한 재량을 인정하여 입법부와 행정부의 최저생계비 결정에 관한 사법적 통제를 포기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 헌재도 빈민, 장애인 등의 없는 자, 서민을 위한 사회보장법 사건에서 입법부와 행정부에 광범위한 재량을 인정하는 대신 엄격한 ‘비례성 원칙’을 적용할 수는 없을까. 최근 시각장애 학생에 대한 점자 교과서가 제때 지급되지 않은 것이나, 장애인 무인정보단말기 접근성을 대폭 후퇴시킨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등에 대하여 헌법소원이 청구되었다. 위 사건에서 장애인 접근권을 별도의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하여 비례의 원칙을 적용하는 법리를 새롭게 인정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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