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
2026년 글로벌 교역환경의 키워드는 불확실성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이 구조화됐고 보호무역은 예외가 아닌 상수가 됐다.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관세정책을 일상화했고 중국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유럽과 신흥국으로 수출의 물길을 빠르게 돌렸다. 세계 교역은 더이상 하나의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 여러 항로로 쪼개진 '교역 분절화'의 시대다.
이 같은 환경에서 FTA(자유무역협정)의 의미도 달라졌다. 과거처럼 관세를 낮춰 가격 경쟁력을 보완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 FTA는 불확실한 통상질서 속에서 우리 기업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전략적 무역거점을 확보하는 장치가 됐다. 최근 타결된 영국과의 FTA 개선협상은 이런 통상 패러다임의 전환을 잘 보여준다.
영국은 단순한 개별 시장이 아니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글로벌 금융·서비스 허브이자 유럽과 북미를 잇는 규범의 교차점이다. 이번 한영 FTA의 가장 상징적인 성과는 자동차 원산지 기준 완화다. 부가가치 기준이 55%에서 25%로 낮아지면서 핵심 광물과 배터리 공급망 변동성이 커지더라도 우리 기업이 안정적으로 특혜관세를 적용받을 수 있게 됐다. 영국을 거점으로 유럽시장으로 확장할 현실적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K푸드와 K뷰티 등 소비재 문턱도 낮아졌다. 가공식품은 원재료 원산지 요건이 제거돼 제3국 원료를 활용하더라도 국내 생산이면 무관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분절화된 공급망 속에서 중소·중견기업의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엔지니어 등 전문인력의 비자요건 정비 역시 공장설립과 운영과정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실질적 개선이다.
영국 입장에서도 이번 타결은 아시아 핵심 시장과의 교역 안정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개정협정으로 영국은 자동차·주류·의약품 등 주력 수출품의 관세 리스크를 제거하고 금융·보험·전문서비스 분야에서 한국 시장 접근성을 확대했다. 데이터 현지화 요구완화와 전자계약 허용 등은 영국 서비스기업의 한국 진출비용과 불확실성을 낮춰준다.
아울러 1976년 투자보장협정을 현대 규범으로 바꾸며 영국과의 투자 '설명서'를 최신판으로 교체했다. '해리포터'의 영국과 K콘텐츠의 한국이 손잡고 디지털·AI 협력 속에 유럽에 진출할 가능성도 넓어졌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디지털무역, AI 협력, 공급망 핫라인까지 포괄한 점이다. 핵심 원자재 공급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10일 이내 긴급회의를 소집하도록 한 공급망 협력 챕터는 정보공유와 대응논의를 가능하게 해 프렌드쇼어링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앞으로 한국의 통상전략은 특정 시장을 대체할 '대안시장 찾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통상전략 역시 중장기 시계에서 재점검할 시점이다. 여러 블록을 연결하는 다층적 무역거점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기술과 규범으로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 한영 FTA는 그 출발점이다. 세계가 장벽을 높이는 관세의 시대일수록 답은 역설적으로 더 정교하고 전략적인 자유무역에 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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