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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야 진짜 이웃이죠” 한파 녹인 골목의 천사들

조선일보 한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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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야 진짜 이웃이죠” 한파 녹인 골목의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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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렌트' 팬 10명이 지난달 22일 서울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을 위해 52만5600원을 기부했다. 사진은 기부확인증 모습./독자 제공

뮤지컬 '렌트' 팬 10명이 지난달 22일 서울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을 위해 52만5600원을 기부했다. 사진은 기부확인증 모습./독자 제공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연말, 서울의 쪽방촌과 보육원 등에 조용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시민들이 조용히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웃을 찾았다. 각자 자리에서 “함께 살아야 진짜 이웃”이라 믿는 우리 시대의 ‘골목 산타’들이다.

“52만5600분(分)의 귀한 시간들, 서로 아끼고 사랑하자.” 뉴욕 빈민가 예술가들의 꿈과 애환을 그린 뮤지컬 ‘렌트’의 메시지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닿았다. 연말을 맞아 뮤지컬 팬들이 대표곡 ‘시즌스 오브 러브’의 가사 ‘52만5600분(1년)’에 착안해 52만5600원을 기부한 것이다.

지난달 22일 팬 10명이 십시일반 모은 돈은 서울역 쪽방 주민 모임인 ‘동자동 사랑방’에 전달됐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기부를 제안한 이모(26)씨는 “가사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이틀 만에 뜻을 모은 이들은 각자 5만2560원씩을 보탰다. 김모(35)씨는 “돈 버는 어른이 돼도 기부가 쉽지 않더라”며 “이번이 작은 시작이 될 것”이라고 했다. 거액은 아니지만 쪽방촌엔 큰 힘이다. 박정민 활동가는 “주민 40명의 일주일 치 급식을 운영할 수 있는 귀한 금액”이라고 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에서 쪽방촌 주민과 함께하는 민족사랑교회 건물 외관./김민혁 기자

서울 용산구 동자동에서 쪽방촌 주민과 함께하는 민족사랑교회 건물 외관./김민혁 기자


영하 6도의 날씨였던 지난달 30일 오후 3시쯤 동자동 쪽방촌 골목에서 만난 ‘민족사랑교회’ 임호성(65) 목사는 20㎏ 설탕 포대와 빵 봉지를 양 어깨에 메고 골목을 오르내렸다. 서울역 인근 푸드뱅크에서 쪽방 주민들에게 나눠줄 물품을 받아온 참이었다. 지난 2022년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임 목사는 건물주에게 교회 퇴거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쪽방촌을 떠나지 않고 아예 아내와 함께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12평 남짓한 교회 공간을 마련했다. “함께 살아야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매주 쪽방 주민과 노숙인 50여 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서울역 노숙인 500여 명에게 물품을 나눈다. 연말에 진행한 라면 6000개 나눔에 이어 새해에는 볶음밥 800인분 배달도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밤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한 보육원 앞에 시민 2명이 몰래 아이들을 위한 과자를 담은 산타 자루를 두고 갔다./독자 제공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밤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한 보육원 앞에 시민 2명이 몰래 아이들을 위한 과자를 담은 산타 자루를 두고 갔다./독자 제공


보육원 앞에 남몰래 마음을 나누고 간 시민도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밤 11시 55분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보육원 ‘영락보린원’ 방범 카메라에는 두 여성이 빨간 산타 자루 하나를 내려놓고 웃으며 돌아가는 모습이 담겼다. 자루 안에는 아이들을 위한 과자 36개가 들어 있었다. 김병삼(63) 원장은 “코로나19 이후로 이런 기부는 처음이었다”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라 무척 기뻐했다”고 했다. 또 성탄절 당일에는 동네 주민인 정희수(92) 어르신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저녁을 먹이고 싶다”며 보육원 아동 47명과 교사들을 위한 햄버거 세트 60인분을 선물했다. 이 밖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디저트 가게 사장, 생활용품을 보내온 시민 등 ‘익명의 산타’들이 잇따랐다.

지난달 22일 오후 6시 50분쯤 서울역 광장에는 200여 명의 노숙인이 줄을 섰다. 오후 7시부터 사회복지재단 ‘꽃동네 사랑의 집(꽃동네)’에서 나누는 따뜻한 밥과 국을 받기 위해서다. 꽃동네는 2015년부터 용산역에서 배급 봉사를 시작해 코로나 이후 서울역까지 배급지를 확대했다. 매번 150~200인분에 달하는 음식을 준비한다. 이날 배급된 식사는 김치콩나물국과 고기 반찬, 백설기로 차려져 단순한 끼니를 넘어 위로가 됐다. 한 노숙인은 “이 국 한 그릇이 추위를 버티게 한다”고 했다.

[한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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