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하는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의 주인공들이 해외 기술에 의존했다는 점이 부각되자 국산 AI의 자격을 둘러싼 공방은 정책적 심문으로 번지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한국의 기술 정책은 언제나 ‘자립’과 ‘국산’이라는 거창한 선언 앞에서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반복해 왔다.
우리는 이미 ‘국산’이라는 명분에 매몰돼 글로벌 흐름에서 고립됐던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2000년대 중반, 한국은 세계 표준 웹 보안 체계 대신 액티브엑스와 공인인증서를 고집했다. 그 결과 국내 웹 환경은 특정 브라우저에 종속됐고 글로벌 인터넷 생태계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교훈은 명확하다.
기술적 폐쇄성은 자립이 아니라 도태를 부른다는 점이다. 현대 AI 산업에서 외부 기술 차용은 '결함'이 아니라 '일상'이다. 글로벌 AI 생태계는 이미 오픈소스라는 플랫폼 위에서 작동한다.
검증된 아키텍처를 참고하고 최적화된 추론 코드를 활용하는 것은 개발 속도와 효율을 높이기 위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자동차를 만들 때 바퀴를 둥글게 만드는 방식을 새로 발명할 필요가 없듯이 이미 성능이 증명된 기술적 표준을 채택하는 것은 기본이다.
문제는 민간에서의 최선이 정부 사업에 이르면 ‘순혈성 훼손’으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특히 정부가 강조하는 ‘프롬 스크래치(From Scratch)’ 기준은 지나치게 모호하다. 가중치를 밑바닥부터 새로 학습하면 충분한가, 핵심 모듈인 인코더까지 자체 개발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없다.
기준이 불분명하니 기업들은 기술 고도화보다 '해석 경쟁'에 매몰되고 서로간의 주장만 오고 간다.
우리가 집착해야 할 AI 주권의 본질은 기술의 ‘출처’가 아니라 ‘통제권’에 있다.
진정한 소버린 AI(Sovereign AI)는 모든 코드를 직접 짰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모델에 들어가는 데이터를 관리하고 운영 권한을 쥐며, 업데이트 방향을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외부의 효율적인 뼈대를 빌려오더라도 이를 완전히 이해하고 우리 식대로 개조해 통제할 수 있다면 주권은 성립한다.
독자성을 외치다 다시 갈라파고스가 되는 순간, 한국 AI는 세계 시장에서 고립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독자성이 아니라 '개방 속의 지배력'이다. 정부는 오픈소스 활용 범위에 대한 현실적인 기술 기준과 투명한 관리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기술 주권은 선언이나 혈통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치밀한 설계와 냉정한 현실 인식, 그리고 실질적 통제 역량에서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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