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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벚꽃을 기다리는 사람들 [김탁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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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벚꽃을 기다리는 사람들 [김탁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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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1부, ‘내년에 벚꽃을 볼 수 있을까?’ 유튜브 갈무리

고희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1부, ‘내년에 벚꽃을 볼 수 있을까?’ 유튜브 갈무리




김탁환 | 소설가



겨울 들녘은 황량하다. 언 땅으로 강바람이 불고 눈이라도 쏟아지는 날엔 오가는 이들이 없다. 마을 회관 입구엔 벗어 놓은 신발이 가득하고 끊임없이 웃음이 흘러나온다. 함께 점심을 만들어 먹는 자리다. 특별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마을 공유 부엌에서 펼쳐지는 평범한 일상이다. 밥상에 둘러앉은 노인들은 지금처럼 이 마을에서 오순도순 끝까지 살고 싶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병원이나 요양 시설로 들어갔다가 그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웃이 적지 않다.



2024년 12월, 우리나라도 전체 인구에서 65살 이상이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각 지역의 거주지에서 노쇠, 질병, 장애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일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고희영 감독이 만든 2부작 다큐멘터리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이 문제를 7년 동안 깊이 들여다본 문제작이다.



등장 공간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재택 의료가 시작된 야마나시현 고후시이고, 등장인물은 매일 오후 왕진을 다니는 가정 호스피스 의사 나이토 이즈미와 환자들과 그 가족이다.



제1부 제목이기도 한 ‘내년에 벚꽃을 볼 수 있을까?’는 야마나시현뿐만 아니라 섬진강을 이웃한 마을 노인들도 종종 던지는 물음이다. 내년 봄 벚꽃이 필 때까지 살고 싶다는 바람과 늘 보던 벚나무에서 꽃이 피는 풍경을 가까운 마을 사람들과 즐기고 싶다는 꿈이 겹쳐 있다.



왕진에 비용을 가산하는 시스템이라거나 맞춤형 간호를 원활하게 하는 방문간호 스테이션 등도 충실히 소개되고 있지만, 내겐 나이토 이즈미의 독특한 깨달음들이 귀에 먼저 쏙쏙 들어왔다. 병원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푸는 곳이 아니라고도 했고, 일상의 소리 속에서 임종을 맞을 때 공포가 더 적다고도 했다. 4천명 이상의 인생과 인연을 맺었고, 집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내도록 보살핀 환자가 400여명이라고 하니, 삶과 죽음, 환자와 의사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많았을까. 병원을 택하든 집을 택하든, 각자의 장단점을 미리 찬찬히 살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읽혔다.



제2부 ‘해피엔딩’은 집에서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생의 막바지에 이르면 가족들은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아예 모여 합숙을 한다. 집에서의 죽음은 가족의 역할이 절반 이상인데, 병원에선 상당 부분을 의료진에 맡긴다. 병원에선 의료진이나 간병인이 환자와 접촉하지만 집에선 가족이 몸과 마음을 써서 돌본다. 환자가 걷지 못해 눕고, 목소리가 작아지고,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몇몇 단어를 뱉고, 그마저도 힘겨워 눈만 겨우 끔벅일 때, 환자와 가족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집중해서 바라보고 말하고 손을 뻗어 어루만진다.



그런데 왜 다큐멘터리 제목이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일까. 환자를 다룬 이야기에서 흔히 기적이라고 여겨온 사건은 담기지 않았다. 의사들이 예상한 때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화면에 나온 노인들은 결국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병든 노인들이 생을 마치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후일담이 이어진다. 집에서 노인들을 돌본 가족 중에서 손주들 근황이 소개된다. 3년이 흘러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여전하다. 어떻게 돌봐드렸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또렷하게 설명한다. 할아버지가 평생 해온 생선 배달을 도맡은 손녀도 있다. 손주 세대가 조부모 세대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이어받기까지 한 것이다.



100살을 넘겨 오래오래 산다거나 중병이 낫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생각과 느낌을 대대로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고희영 감독에겐 기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아닐까. 환자가 집에서 보낸 마지막 나날은 단절을 확정 짓는 단계가 아니라 계승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당당하게 마친 이에겐 사망진단서라는 낡은 양식보다 인생 졸업장이 더 어울린다. 가장 어린 손주가 노인의 이름이 적힌 졸업장을 받아 간직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오래전 이문재 시인과 잠시 차를 마셨을 때, 우리 세대는 대부분 정든 집을 떠나 낯선 병원에서 죽어가리라 예측한 적이 있다. 늙고 병든 이들을 따로 떼어 특정 공간에 모아 관리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여전히 큰 흐름이다.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이유가 따라붙는다. 불편하고 불안전한 구석이 있더라도, 내 마을 내 집에서 살다 가려는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품을 것인가. 또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워 간직할 것인가. 내가 곧 죽는다면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지내고 싶은가. 경험의 멸종이 횡행하는 시절에 나답게 끝까지 사는 법을 일깨우는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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