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징수권은 국가가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날로부터 5년(5억 원 이상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런데 감사원에 따르면 국세청이 이 소멸시효를 위법·부당하게 적용해 2021∼2023년 체납자 5302명의 체납세금 1조4268억 원을 없애줬다. 부동산, 예금, 보험 등 압류 재산 일부에 대한 조사에서 드러난 게 이 정도다. “국세청이 누적 체납액 부실 관리 비난을 우려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감사원 발표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발단은 2020년 국회 국정감사였다. 의원들이 누적 체납액 공개를 요구하자, 국세청이 122조 원의 누계 체납액을 100조 원 밑으로 떨어뜨리기로 했다고 감사원은 파악했다. 당시 국세청 한 국장은 감사원 조사에서 “청장 보고 과정에서 별다른 근거 없이 120조 원, 110조 원, 100조 원, 90조 원 중 100조 원을 고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결과 2021년 말 기준 누계 체납액은 99조9000억 원으로 줄었다. 그해에 소멸시효가 끝나 사라진 체납세금은 연평균의 약 2.7배였다. 하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적 체납액은 2022년 102조, 2023년 106조, 2024년 110조 원으로 도로 늘었다.
▷국세청이 누계 체납액을 단기간에 줄이기 위해 압류 재산 종류가 많지 않은 고액 상습 체납자의 체납액을 우선 정리하도록 지시했다는 게 감사원 지적이다. 국세청이 부당하게 줄여준 세금의 절반이 고액 체납자 1066명의 체납액(1인당 6억8000만 원)이었다. 이들 중 208명은 고액 상습 체납자였고, 90명은 출국금지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소액 체납자는 제외돼 재기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역차별을 받았다.
▷감사원 감사 결과 국세청은 목표 달성을 위해 총 12차례에 걸쳐 점검 지침을 지방청에 내려보냈다. 지방청별로 누계 체납액 20% 감축 목표를 정해 놓고 실적을 세세히 관리했다. 국세청은 “명백하게 잘못된 일 처리였다”면서도 “조직적으로 누적 체납액 통계를 줄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미국 정치 철학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과 세금만 빼고”라는 명구를 남겼다. “한국에는 죽음처럼 확실한 세금을 회피할 묘수가 있다. 국세청이 알아서 없애준 ‘소멸시효’가 그렇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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