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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바꿔 놓은 남미의 운명[서광원의 자연과 삶]〈117〉

동아일보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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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바꿔 놓은 남미의 운명[서광원의 자연과 삶]〈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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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1532년 11월 16일, 페루 북부의 카하마르카에서 역사를 바꾼 전투가 벌어졌다. 그 양상은 우리가 떠올리는 ‘전투’와는 사뭇 달랐다. 들판에서 맞붙는 전투라면 대개 병력 규모가 엇비슷하기 마련인데, 이 싸움은 전력 차가 컸다. 한쪽은 8만 명의 대군이었고, 반대쪽 군사의 수는 고작 168명에 그쳤다.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168명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상대편 군사 7000여 명을 죽이고 마침내 황제까지 사로잡았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피사로는 1년 뒤 수도 쿠스코까지 점령했다. 스페인의 번영과 남아메리카의 비극은 이때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168명이 8만 대군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진화생물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이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총, 균, 쇠’가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군은 화승총과 쇠로 무장했지만, 잉카군에게는 그런 무기가 없었다. 철 제련법을 알지 못했던 잉카의 무기는 청동기와 나무곤봉, 손도끼 등이 전부였다. 여기에 피사로의 군대가 이동하는 경로마다 천연두가 먼저 퍼지면서 잉카군에게는 이미 불안과 공포가 깊게 깔려 있었다.

당시 스페인군은 기병 62명과 보병 106명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이들 역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곧 양상은 달라졌다. 이미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있던 잉카군은 전투가 시작되자 생전 처음 마주한 낯선 것 앞에서 싸울 의지를 잃었다. 천둥처럼 울리는 총성과 나팔 소리, 그리고 말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스페인군이 사용한 화승총은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성능도 형편없었다. 수량 역시 여남은 자루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소리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더 위협적인 존재는 말이었다. 피사로는 잉카인들이 말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말에 딸랑이를 달았다. 처음 본 거대한 동물이 사람을 태운 채 달려오고, 그 과정에서 낯선 소리까지 쏟아내자 잉카군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말을 화면이나 사진으로 접할 때가 많아 크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하면 말은 엄청나게 크다. 평균 몸무게는 500kg에 이르고, 체구가 큰 말의 높이는 2m에 가깝다. 이런 덩치를 가진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달려드니 얼마나 무섭고 놀랐겠는가. 군사용으로 훈련된 말은 사람에게 사정없이 부딪치기까지 한다. 변변한 무기조차 없던 잉카군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인류 역사에서 말은 오랜 시간 변화의 주역이었다. 인간이 갖지 못한 속도와 덩치를 지닌 말을 활용한 이들은 항상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칭기즈칸 역시 말이 지닌 기동력을 이해하고 활용한 인물들이었다. 말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미래로 나아가는 속도를 키워주는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지금도 변함없는 과제다. 인공지능(AI)이라는 시대의 말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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