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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깃털처럼 가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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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깃털처럼 가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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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결심공판 17시간 만에 종료
오른쪽 어금니가 아팠다. 석사 논문을 쓰던 무렵이었다. 시간 여유가 없고 치료비를 부담할 여력도 안 되어 치과 가길 미뤘다. 통증은 점차 심해지다가 어느 시점엔가 뚝 멎었다. 그러더니 몇달 후 겨울밤, 초코바를 베어 물다 이가 과자처럼 바사삭 부서졌다.

합동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배들이 당장 병원에 가라고 성화였다. “너, 충치를 오래 방치하면 치아 바이러스가 신경을 타고 눈동자로 간단다.” “에이, 뻥이죠?” 깔깔 웃어놓고도 내심 겁이 났다. 그러고서 얼마 안 지난 토요일 저녁,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깜짝 놀랐다. 거울 안의 내 오른쪽 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되어 있었다. ‘핏발 서다’의 비유를 넘어 핏빛이 선연했다. 순간 선배들의 엄포가 떠올랐다. 아, 급기야 그 일이 일어났구나. 이러다 오른쪽 눈이 멀면 어쩌나. 별의별 무서운 상상이 스쳤다. 일반병원에 가려면 이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시간을 끌다간 치아 바이러스가 눈의 핵심영역으로 침투할 것만 같았다. 급한 대로 학교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 밤의 대기실 풍경이 떠오른다. 환절기라 독감 걸린 꼬마들이 다수였고, 어떤 여학생은 집에서 강아지에게 입 맞추다 입술을 물렸다고 했다. 한 아주머니는 코가 내려앉았고, 다른 아저씨는 피트니스 도중 팔 근육이 늘어났단다. 여러 날 못 잔 듯 피부가 꺼칠한, 또래로 보이던 수련의는 “이가 썩으면 정말 치아 바이러스가 눈으로 가나요?”라는 떨리는 물음에 대체 그런 이상한 말은 어디서 들었냐며 피식거렸다. “그렇게 해서 후배를 치과에 보내요? 어이쿠, 자상한 선배들 뒀네요.” 한 무지한 문과생의 공포를 잠시나마 일각에 제거해준 의학 전공자의 실소가 어찌나 고맙던지. ‘쓰레빠’를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고단한 그의 맨발을 보며, 종일 피 보고 신음 들으며 일할 이에게 잠깐이나마 내가 웃음을 주어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과로 아니면 과음이 결막밑출혈의 원인일 거라며, 잘 자고 푹 쉬면 열흘 안에 말끔해질 거라 했다. 월요일에 내 눈을 본 지도교수님은 지난주에 연구과제 제안서를 준비하느라 밤새도록 일하다 그리된 줄 아시곤 안쓰러워하며 마감 늦어져도 괜찮으니 가서 쉬라 하셨다. 우리 선생님은 지금껏 모르고 계실 테지. 실은 내가 그 전주에 제안서를 팽개쳐두고 술자리에 합류해 고량주를 다섯 잔이나 마셨던 것을 말이다. 과음으로 인한 토끼 눈은 과연 열흘 안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응급실’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다.

몇해 전 얻은 지병으로 인해 이따금 수혈을 받는다. 그러고 나면 백혈구와 적혈구와 혈소판을 보통 사람만큼 갖고 있던 시기의 세상은 이런 감각이었구나 싶다. 맥박이 귓가에서 쿵쾅쿵쾅 뛰지 않을 때의 몸은 이랬지, 비탈길이나 층계를 오를 때 이 정도까진 원래 괜찮았지, 하며. 그래도 나의 질환은 혈액병원에서 가장 가벼운 축에 든다. 지난번엔 수능 앞둔 손주를 두신 분께 침대칸을 양보하고, 그분 손주의 학업 성취도에 관해 들으며 두 시간 동안 보조석에서 수혈받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게서 상냥한 향이 난다며 사용 중인 향수 이름을 물으시어 그 이야기도 한참 나눴다. 어릴 적 주사 맞은 후 진료실에서 나눠주던 사탕이 떠올라, 나오는 길엔 근처 근사한 과자가게로 들어가 마카롱 얹은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이 허기를 영구히 채울 수 없듯 적혈구 두 팩이 혈관으로 흘러든 후 느낀 신체의 온전함 또한 영속되지 못한다. 간헐적으로 나누어 받은 피로 일상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남보다 멍이 다소 쉽게 들고, 피 흘림이 좀 늦게 멎고, 맥박이 약간 빨리 뛰는 상태로 일하고 공부하며 가르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응급실의 기억이 그렇듯 수혈의 기억도 이렇게 항상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되면 좋겠다. 그대가 짊어진 생의 짐 또한 그랬으면 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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