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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스펙의 종말

파이낸셜뉴스 조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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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스펙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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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원 논설위원

조창원 논설위원

"한 우물을 파라. 그러면 평생 먹고살 수 있다."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했던 말이다. 은행원은 은행 업무만, 회계사는 회계만, 개발자는 코딩만 하면 평생 같은 일을 하고 퇴직금 받고 연금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우물 두 개를 파라." 한 분야 깊은 전문성에 더해 다른 전문성도 갖춰야 먹고살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다.

2023년 챗GPT가 등장하면서 이 공식마저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코딩도, 디자인도, 데이터 분석도, 심지어 전략 기획까지 한다. 인간이 우물을 여러 개 파봐야 소용없다.

AI 공습으로 교육기관도 기업 조직도 이른바 '멘붕'에 빠졌다. 2026년 새 학기를 준비하는 대학 관계자들은 요즘 한숨이 푹 나온다. 시대 흐름에 맞춰 AI 활용과목을 준비했지만 정작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다. 기업들은 아예 신입 직원 채용을 확 줄였다. AI보다 못한 신입 직원을 뽑느니 기존 직원에게 AI 활용교육을 하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교육 현장에선 AI 시대에 걸맞은 미래 인재 모델이 표류 중이고, 기업은 신입 직원을 거부한다. 교육의 상실과 사회 진출 퇴로가 막힌 청년들의 구조적 실업 수난 시대가 시작됐다. 청년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기성세대는 알기나 하는가. 청년들의 대량실직 사태가 눈앞에 닥쳤지만 우리 사회는 실험실 비커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 둔감하다.

1970년대 등장한 지식, 기술, 태도 중심의 역량 모델은 인재 채용과 관리의 표준 교과서로 건재하다. 2000년대 확산된 전문성과 융합 중심의 T자형 인재나 π자형 인재 모델은 역량 모델의 대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AI 시대에 이런 모델은 힘을 잃었다. 기존의 인재 모델은 기능 혹은 스펙 중심이다. AI가 자동화와 속도로 인간의 기능을 대체하는 마당에 우리는 기존 기능주의 모델만 붙들고 있다. 물리학으로 치면 스칼라(Scalar)에 집착하고 있다. '온도 30도' '속도 시속 100㎞'와 같이 크기만 측정하는 것처럼 인재 관리와 평가는 여전히 '역량 점수 90점' '경력 10년' '자격증 5개'만 따진다. 반면 AI를 잘 활용하면서도 인간 고유의 경쟁력을 살리는 대안은 없다. '스칼라 시대'가 저물었다면 '벡터의 시대'를 찾아야 하는데 제자리걸음이다.


AI가 인간의 업무를 먹어 치우는 시점에 그나마 대안으로 제시되는 건 인간 스스로 설계하고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힘이다. 인간 고유의 경쟁력인 경험과 판단, 그리고 책임 역량을 키워야 그나마 AI에 맞설 수 있다. 벡터로 비유하자면, AI를 활용한 지식과 기술 역량을 갖추는 게 급선무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통해 AI 의존에서 벗어나 나아갈 방향을 판단하는 힘이 요구된다. 나아가 AI를 활용해 본인의 지식과 판단을 적재적소에 적용하는 의사결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본인의 여러 역량을 한데 결집해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융합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 우물만 파면 된다던 시대에 비하면 정말 피곤한 세상이 됐다. 피곤함보다 더 두려운 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몰라 눈앞이 캄캄하다는 점이다. 기성세대는 그저 AI를 잘 활용하고 질문을 잘 하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댄다.

AI는 우리가 익숙했던 지능 중심의 능력주의라는 정의 자체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20세기는 '얼마나 많이, 빨리, 정확하게'를 강조한 시대였다면, AI 시대는 '왜, 어디서, 어떻게'를 잘해야 살아남는다. 스칼라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 패러다임 변화를 제대로 체감하고 있는가. 과거 스펙주의에 매달린 채, 새 좌표를 찍지 않는다면 개인도 조직도 사회도 미래는 없다.


jjack3@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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