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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한 날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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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남북관계 개선 희망 개꿈...도발 사과해야"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엄마.”



딸이 깨웠다.



“엄마.”



딸이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 일어나요.”



딸이 깨우는 소리를 의식이 잦아든 순간 들었다. 멀리 타이(태국)에 있는 딸의 목소리가 그를 깨워 살렸다고 수다랏(가명·54)은 믿었다.



그날(지난해 3월6일) 아침 경기 포천 이동면의 한 농장에서 수다랏이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을 때, 전북 군산에선 케이에프(KF)-16 전투기 두대가 공군기지를 이륙(오전 9시10분)했다.



사장을 뺀 노동자 6명 모두 외국인인 농장이었다. 수다랏 등 타이인이 4명이었고, 네팔인과 미얀마인이 1명씩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농장에서 사장까지 4개 국적의 사람들이 섞여 일했다. 농장의 공용어는 손짓 발짓과 얼굴 표정이었지만 국적과 부사를 결합한 명령어만으로도 농장은 돌아갔다.



“태국 빨리빨리.”



“미얀마 빨리빨리.”



7년 넘게 일했어도 노곡리란 지명 외엔 아는 것 없는 농장에서 수다랏이 빨리빨리 움직이고 있을 때, 전투기들이 ‘대기지점’(holding point·임무 수행을 위해 대기하는 공중 구역)에 도착(9시45분)했다.



2017년 말 수다랏은 와수리(강원 철원 서면)란 지명 말곤 아무것도 모르는 피망 농장에서 해고됐다. “부부 노동력이 필요한데 여자 혼자여서 안 되겠다”며 일한 지 한달 만에 사장이 농장에서 내보냈다. ‘알선자’가 알려준 주소를 택시 기사에게 건네고 포천까지 오는 동안 타이에서 한달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길 위에서 사라졌다. 그때부터 8년째 살아온 농장에서 수다랏은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1년에 한번쯤 택시를 불러 가까운 타이 식당에서 고향 음식을 먹고 오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비자가 없는 그는 단속이 두려워 농장 안에 스스로를 가뒀다.



전투기들이 대기 지점을 출발(10시1분)해 작전에 돌입했을 때, 수다랏은 하늘을 찢는 소리가 “너무 익숙해서 별생각 없이” 근대를 땄다.



전투기 굉음이 들릴 때마다 동네 주민들이 ‘익숙한 불안’에 시달린다는 것을 수다랏도 알았다. 포천에만 9개의 사격장이 있었고 그중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격장(승진과학화훈련장)이 있다는 사실은 수다랏이 몰랐다.



그 농장에선 시금치와 쑥갓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잎채소들을 재배했다. 사장이 씨를 뿌리면 ‘수다랏들’은 기르고, 수확하고, 포장했다. 그곳에서 일하기 전까진 근대를 먹어 본 적 없고 발음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생산한 근대가 한국인들의 밥상에 올랐다. 그들 노동 없인 ‘우리’의 신토불이 밥상도 없다는 사실은 ‘원산지 표시’에 표기되지 않았다.



콰앙.



무게 226.8㎏에 순 폭약량 87.1㎏의 폭탄 8발이 목표한 사격장(승진훈련장에서 한미 통합화력 실사격 훈련)을 벗어나 투하(10시4분)됐을 때, 수다랏은 근대를 손에 움켜쥔 채 쓰러졌다.



성당을 낀 삼거리에서 파란색 트럭이 좌회전하던 순간, 트럭 앞에 폭탄이 떨어졌다. 파편이 운전자의 목에 꽂혀 중상을 입혔다. 주택 지붕이 무너졌고 창문이 와르르 깨졌다. 파편은 멀리까지 날아가 쏟아졌다. 엠케이(MK)-82 폭탄의 ‘위험 파편 거리’는 213m였다. 폭풍 피해 범위는 89.9m였고 살상 반경은 33m였다. 잘못 투하된 폭탄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이 155m와 폭 50m의 총 폭파구를 형성했다. 삼거리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성당 맞은편에 수다랏이 일하는 농장이 있었다. 쾅 소리와 동시에 수다랏은 하늘에 붙은 불을 본 것 같았다. 정체 모를 구름도 치솟았다. 공포에 질려 몇걸음 달아났을 때 다리가 꺾였다. 모두 도망쳐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수다랏은 정신을 잃었다.



“엄마 엄마, 어서 일어나요.”



전투기 조종사들이 표적의 위도 좌표 ‘×× 05.×××’를 ‘×× 00.×××’로 잘못 입력(위도 1분은 실거리 1852m에 해당)했다는 사실을 인지(10시6분)했을 때, 수다랏은 딸이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무서운 것’에게 잡힐까 봐 몸이 쓰러진 상태에서도 의식은 계속 도망쳤다. ‘타이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죽을 순 없다’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흔들어 깨우는 감각을 느꼈을 때 수다랏이 눈을 떴다. 피신했던 사장과 동료들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와 부축했다. 손과 발에서 뒤늦은 통증이 밀려왔다.



“몰라. 몰라.”



아무도 몰랐다. 살려고 도망쳤지만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지 그때까지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 타이 동료는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고 기억했다. 이날 오폭으로 민간인 40명과 군인 25명이 다쳤다. 타이 정부는 부상자에 자국민 4명이 포함됐다고 이튿날 발표했다. 1명은 손과 발에 중상을 입어 수술 예정이라고 외교부 대변인이 밝혔다.



‘그 한명’ 수다랏은 포천의료원에서 손목 열상을 봉합했다. 국군수도병원(경기 성남)으로 옮겨져 발에 박힌 파편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한국 공군의 폭탄에 다쳤다는 사실은 입원 초기 의사소통을 도운 타이인 통역사한테 듣고서야 알았다. 수다랏은 퇴원 뒤 다시 남양주(경기)로 보내졌다. 포천에서 지낼 곳이 없어 임시 숙소가 있는 남양주외국인복지센터에 머물며 공군의 배상 결정을 기다렸다.



차이야품.



엄마를 깨워준 딸이 있는 곳이자 수다랏의 고향. 방콕에서 북동쪽으로 370㎞ 떨어진 숲과 산과 고원의 땅이었다. 카사바와 사탕수수 재배가 주산업으로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에겐 장애가 있었고, 남편과는 이혼했다. 수다랏이 차이야품에서 했던 청소 일로는 가족의 빚을 갚지 못했고 생계를 책임질 수도 없었다. 포천 농장에서 월급 200만원(피해 당시)을 받으면 170만원을 태국으로 보냈다. 남은 30만원은 식비로 동났다. 옷은 얻어 입었다. 수다랏은 2년만 더 일한 뒤 딸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딸만 제힘으로 살 수 있게 되면 그의 남은 생은 가난해도 좋을 것 같았다.



‘무서운 숫자’였다.



사건 9개월 만에 국가배상 결정이 통보(지난달 1일)됐다. 7개의 숫자를 본 수다랏의 감정은 “무서움”이었다.



그동안 그에겐 배상 신청 절차가 제대로 안내되지 않았다. 그를 돕는 남양주센터가 기관들에 진행 상황을 문의했을 때에야 피해자가 서류를 접수하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공군의 의뢰를 받아 배상액을 산정하는 손해사정법인이 수다랏에게 보낸 안내 문자는 한글이었다. 수다랏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했더라도 복잡한 절차를 수행할 수 없었다. 센터의 도움으로 급히 자료를 제출했지만 ‘현금 월급’을 받아온 그에겐 근무 기간과 급여 액수를 증명할 계약서나 명세서가 없었다.



184만1610원은 휴업배상금 96만1610원과 위자료 88만원(입원 44일×2만원)을 합한 금액이었다.



공군은 배상금 산정 기준으로 한국이 아닌 타이의 평균 최저임금(하루 374바트×환율 42.15원=1만5764원)을 끌어왔다. 수다랏의 체류자격이 없다는 이유였다. 폭탄 피해로 일하지 못한 기간도 9개월 대신 두달(같은 농장의 다른 피해자인 미얀마 등록 노동자 휴업기간 61일)을 적용했다.



수다랏의 상심은 컸다. “사람 목숨 두고 차별하는 것 같아” 그는 매일 울었다.



그에게 숙식을 제공 중인 이영 신부(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장)가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신부에게 국방부 논리는 “책임 회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체불임금 피해 구제에서도 미등록 여부는 문제 삼지 않는 시대였다. “만약 수다랏이 미등록 미국인이라면 미국 임금으로 계산해서 줄 건지” 묻고 싶었다. “한국 사람으로 부끄러워” 변호사 선임을 도왔다.



날벼락은 공평하지 않았다. 같은 벼락을 맞아도 사람에 따라 ‘벼락 값’이 달랐다. 고통을 인정받는 데도 자격(☞15회 ‘자격의 가격’)이 필요했다.



“차라리 죽었다면 지금보단 (배상이) 나았을까요.”



의사가 진단한 수다랏의 병명 중엔 폭풍손상증후군(폭발 충격파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손상)이 있었다. 그는 폭풍보다 후폭풍이 더 무서웠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그에게 진짜 손상은 폭탄에 다친 손발이 아니었다. 그에게 지난 9개월은 “몸을 회복하는 시간이 아니라 일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더 이상 한국에선 일할 수 없었고 태국 아이들에게 돈을 보낼 수 없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소송(지난달 23일 공군 결정에 불복하는 손해배상소송 제기) 동안 한국에서 지낼 돈도 없었다. 그가 잃은 것은 “건강도 시간도 아니고 일”이었다.



마음은 통역만으론 전부 전달되지 않았다.



“7년 동안 한국에서 돈 벌 수 있어서 감사해요. 그 돈으로 타이 가족들이 살 수 있었어요. 폭탄 피해를 입고부터 너무 슬프고 힘들어요. 일해야 해요. 일하는 것이 제가 사는 이유입니다.”



수다랏이 정말 통역되길 바라는 것은 그 간절함이었다.



이문영 | 이슈팀 기자. 책 ‘웅크린 말들’ ‘노랑의 미로’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루카스’ 등을 썼다. 세기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진 못해도 누구든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小說)의 주인공은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자격’을 인정받은 적 없는 이야기들이 글이 되고, 읽히고, 연결될수록 언어와, 기록과, 서사의 틈들도 조금은 메워질 것이라 믿는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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