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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증거가 이렇게 곳곳에”…3명 남녀의 엇갈린 사랑, 유명 그림의 비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편]

헤럴드경제 이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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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증거가 이렇게 곳곳에”…3명 남녀의 엇갈린 사랑, 유명 그림의 비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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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로코코의 마지막 화가?…그저 경박한 그림만 그렸는가
‘욕망’의 그림, 한때 주문 쇄도…결국, 시대가 외면했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일부 확대),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일부 확대),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그네 타는 여인의 ‘비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젊은 여성이 그네에서 분홍색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그녀가 쓴 양치기 모자에는 꽃잎이 맺혔다. 주름 장식의 드레스 또한 꽃송이처럼 풍성하다. 여인은 공기를 가르며 청춘을 흩뿌린다. 그것은 싱싱한 꽃과 잎사귀가 돼 바닥에서 피어나는 듯하다. 그녀의 장난기 어린 시선을 따라가보면, 한 남성이 보인다.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는 비스듬하게 누워 여성을 본다. 정확히는 그녀의 펼쳐진 옷, 그 안쪽을 보고 있다. 사내의 얼굴은 달아오른다. 모자를 쥔 손을 탐욕스럽게 뻗는다. 공중에 뜬 분홍신 따위야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다. 여기까지만 짚으면, 그렇다. 이 그림 주제는 청춘남녀의 사랑으로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앞이 아닌 뒤를 보는 순간, 작품의 장르는 로맨스에서 이른바 ‘막장’으로 바뀐다. 그곳에는 여인의 남편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남성이 있다. 그는 아내와 외간 남자 사이 무슨 전기가 튀는지도 모르는 듯 그네만 밀고 있다. 서글플 만큼 열심히, 안타까울 만큼 흐뭇한 표정으로.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일부 확대),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일부 확대),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일부 확대),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일부 확대), 1767, 캔버스에 유채, 81x64.2cm, 월리스 컬렉션



그러고 보니, 주변 환경도 심상찮다.

화폭 왼편에선 사랑의 신 에로스를 볼 수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손가락을 들어 ‘쉿’하는 포즈를 취한다. 이는 여인과 덤불 속 남성 사이 은밀한 관계를 뜻할 것이다. 화폭의 약간 오른편에서는 장난꾸러기 아기 천사 푸티가 서로 붙어있다. 이들은 불륜 현장을 안쓰럽게 보는 느낌이다. 다만 단지 그뿐, 초를 칠 생각까지는 없어 보인다. 흰 털의 강아지만이 눈앞 상황이 못마땅한 듯 짖어본다. 하지만, 너무 작은 이 녀석을 신경 쓰는 이는 없다.

부드러운 햇빛, 샛노란 공기, 화폭을 가득 채우는 초록…. 작품은 이처럼 쾌활하기에 더 발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화려한, 가장 감각적인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75년경, 캔버스에 유채, 215.9x185.5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75년경, 캔버스에 유채, 215.9x185.5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선생.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있었소.
생 줄리앙 남작이 그림을 보며 웃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화가가 물었다. “다들 왜 선생을 찾아가보라고 했는지 알겠소. 정말… 선을 아슬아슬하게 잘 탄 작품이오.” 남작이 말했다. 그는 화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잘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사실, 남작이 이 그림을 받아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남작은 권세를 누렸다. 그에게 세상은 쉬웠다. 남작이 가장 먼저 즐긴 건 여색이었다. 그는 여자를 좋아했다. 남편 있는 여자와 짓궂게 노는 일은 더 좋아했다. 문득 자기 취향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한 역사 화가에게 요청했다. 돈은 줄 만큼 주겠다. 그러니 자신이 “사랑스러운 여성(유부녀)의 다리를 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그림을 만들어 달라고. 불륜을 눈치채지 못한 남편? 그런 사람은 성직자처럼 그려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장의 본인 앞에선 종교 또한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위력(威力) 과시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문을 받은 화가의 사정은 그와 같을 수 없었다. 괜히 논란에 휘말릴 수 있기에 물러났다. 그런 그가 남긴 말이 이것이었다.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를 만나보시죠. 그라면 방법을 찾을 겁니다.”

“젊은 나, 늙은 상대, 풍경을 볼 수 있는 나, 풍경을 볼 수 없는 상대, 상황을 주도하는 나, 상황에 끌려가는 상대…. 프라고나르 선생. 당신은 내 욕망을 꿰뚫어 보았군. 이런 도발적인 삼각 구도라면, 굳이 성직자를 그릴 필요도 없겠소.“

“그러면, 남은 대금을 기다리지요.” 프라고나르가 남작의 손을 놓고 답했다. 프라고나르는 이처럼 영리하고, 출중했다. 속을 쉽게 알 수 없지만, 의뢰만 하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결과물로 빚었다. 그 시절 가장 화려하고, 가장 감각적이었던 ‘로코코(rococo)’의 방식으로.

귀족을 위한 귀족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웃는 얼굴의 자화상, 1800년경, 12.6x10.1cm, 루브르 박물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웃는 얼굴의 자화상, 1800년경, 12.6x10.1cm, 루브르 박물관



프라고나르라고 하면 먼저 그의 화사한 그림을 떠올리기 쉽다.

프라고나르라는 이름 자체는 생소할 수 있지만, 그의 화려한 작품은 살면서 한 번 이상 마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프라고나르 또한 귀족 또는 그에 준하는 환경에서 나고 살았으리라고 막연히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라고나르의 여정은 보기보다 무난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 뜻밖 선택을 하기도 했으며, 격동하는 시대로 인해 상당한 파란(波瀾)을 겪기도 한 인물이었다.

착실하게 성장한 ‘유망주’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우상에 제사를 지내는 예로보암, 1752, 캔버스에 유채, 115x145cm, 파리 보자르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우상에 제사를 지내는 예로보암, 1752, 캔버스에 유채, 115x145cm, 파리 보자르



프라고나르는 1732년 프랑스 남부의 해안도시 그라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장갑을 만들어 파는 상인이었다. 프라고나르는 여섯 살이 된 1738년에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몇 년 후에는 형편이 기울어 법조인 사무실에서 잡일도 했다. 그러던 프라고나르는 10대 초중반쯤,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작업실로 들어간다. 그때 그는 견습생 자격이었다. 부셰는 프랑스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받을 만큼 실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부셰가 프라고나르의 붓질을 심상치 않게 봤다. 아직 여물지는 않았지만, 손끝에서 묻어나는 건 분명 타고난 끼였다. 부셰는 그 시절 정물화의 거장,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에게 “기초부터 제대로 가르쳐보라”며 그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특훈을 마친 프라고나르는 부셰에게 돌아왔다. 1749년의 어느 날, 당시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프라고나르의 두 손은 어느덧 탄탄해져 있었다. 그는 곧장 기량을 꽃피웠다. 3년이 더 흐른 후에는 스승 발자취를 따라 로마상을 받는 영광도 안았다. 영예를 준 그림은 <우상에 제사를 지내는 예로보암>이었다. 은은한 명암 대비와 여러 색의 조화, 밀도 높은 구성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모습이었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코레소스와 칼리오에(코레소스가 칼리오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 1765, 캔버스에 유채, 309x400cm, 루브르 박물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코레소스와 칼리오에(코레소스가 칼리오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 1765, 캔버스에 유채, 309x400cm, 루브르 박물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코레소스와 칼리오에, 1765년경, 캔버스에 유채, 앙제 미술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코레소스와 칼리오에, 1765년경, 캔버스에 유채, 앙제 미술관



프라고나르는 곧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14~16세기 르네상스 시절의 찬란한 예술품을 둘러봤다. 로마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특전 덕이었다. 1765년, 5년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파리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제목은 <코레소스와 칼리오에>였다. 신의 저주로 광기에 물든 마을. 여인 칼리오에가 산 제물로 나서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때, 그녀를 흠모했던 시인(또는 사제) 코레소스가 대신 목숨을 바친다. 실은 이 재앙은 코레소스가 부른 것이었다. 앞서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었다. 결과는 거절. 수치심에 젖은 그가 직접 신에게 보복을 부탁했고, 그 결과 마을 전체가 이 지경에 빠졌던 것이었다. 그랬던 사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그녀 대신 희생에 나선 모습이었다. 그림 속 단검으로 자기 몸을 찌르는 이가 코레소스, 고개 떨군 흰옷의 여인이 칼리오에라고 한다.

<우상에 제사를 지내는 예로보암>보다 색채는 더 과감하다. 꽃과 하늘 등 장식적 요소도 더 풍부해졌다. 프라고나르의 그림은 찬사를 받았다. 덕분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에도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엘리트 코스를 밟을 것으로 보였다. 왕의 신임을 받고, 잘 풀리면 아카데미 교수, 나아가 교장도 될 수 있을 듯했다. 당시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갑자기…‘경박하게’ 방향을 틀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밀밭에서, 캔버스에 유채, 33.3x45.7cm, 개인소장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밀밭에서, 캔버스에 유채, 33.3x45.7cm, 개인소장



그런데, 프라고나르는 그 길을 걷지 않는다. 그뿐인가. 장엄한 아카데미식 결과물을 내놓기도 꺼린다.

그의 그림은 끝없이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워지다 못해 다소 경박해지고, 적잖이 에로틱해지기까지 한다. 그의 살롱 데뷔작에 손뼉을 친 아카데미 사람들 틈에선 “음란의 늪에 빠져 타락했다”는 식의 비난까지 나왔다고 한다.

프라고나르가 택한 화풍은 로코코였다. 로코코 회화가 그려내려고 한 건 사랑이었다. 화폭에 흩뿌리려 한 건 사랑의 수많은 형태, 그것이 맞물려 빚어지는 다채로운 애정 행각이었다.

지금껏 화단(畫壇)에 강한 영향력을 보인 건 바로크 회화였다. 이는 로코코와는 확연히 다른 화풍이었다. 바로크는 사랑보다 의미를 우선순위로 올렸다. 간질간질한 애정 행위보다는 신화와 역사의 극적 장면을 캔버스에 집어넣었다. 그런 식으로 그림을 더 진지하고, 더 엄숙하게 그려내는 양식이었다. 이런 가운데, 바로크가 아닌 로코코를 택한 프라고나르는 살롱전 출품도 멈춘다. 앞서 생 줄리앙 남작의 <그네> 사례처럼, 로코코식 그림을 원한 부유층에게 주문 제작 받기를 선호한다. 있는 자들 사이에서 사치와 향락이 일상이던 시기, 그의 낭만적인 그림을 원하는 이는 화단 밖에서도 차고 넘쳤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눈가림 놀이, 1750~1752, 캔버스에 유채, 116.8x91.4cm, 톨레도 미술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눈가림 놀이, 1750~1752, 캔버스에 유채, 116.8x91.4cm, 톨레도 미술관



그렇다면 그는 왜 권위와 명예가 보장되는 여정에 임하지 않았는가. 살롱전도 등지고, 아카데미와의 연결고리 또한 사실상 놓으려고 한 무엇인가.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먼저, 프라고나르의 스승이 다름 아닌 부셰였다는 점을 다시 짚어봐야 한다. 부셰의 장기는 화폭에 은은한 관능적 분위기를 심는 일이었다. 그런 부셰를 따른 프라고나르는 이미 더 젊을 적부터 <눈가림 놀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렇듯 프라고나르는 처음부터 로코코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보수적 화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잠시 그 특기를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맞지 않는 일을 끝까지 이어갈 수는 없는 법이다. 실속 없이 엄숙한 그 세상에 질려 회귀를 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돈도 영향을 줬을 수 있다. 프라고나르는 보통 집안 출신이다. 그에게는 평론가의 눈만 보며 고고하게 붓질을 할 여유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밀스러운, 음란하기까지 한 그림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빗장, 1770~1777년경, 캔버스에 유채, 73.5x93.5cm, 루브르 박물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빗장, 1770~1777년경, 캔버스에 유채, 73.5x93.5cm, 루브르 박물관



남자가 여자를 품으로 잡아당긴다.

여자는 남자의 턱을 밀치지만,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남자의 노는 손은 문 빗장을 향해 뻗고 있다. 이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홱 걸어버린다. 정상 연인이라면 한쪽은 끌어안고, 또 한쪽은 밀어내버리는 상황이 쉽게 나올 수 없다. 일반적 관계라면 이런 행위를 하기 위해 굳이 문을 걸어 잠글 필요 또한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러고 있는가. 많은 감상자는 이를 유부남과 유부녀의 비밀스러운 애정 행각으로 해석했다. 일부는 남성의 폭력 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현장으로 여기기도 했다. 가장 사적인 공간, 침실.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건 붉은색 욕망이다. 불쑥 튀어나온 침대 모서리에는 사과가 놓여있다. 이는 괜히 선악과를 떠올리게도 한다. 프라고나르의 <빗장>. 여인의 목과 남자의 둔부, 침대 위 주름 등 곳곳에 곡선이 새겨진 그림이다.

로코코 화풍의 어떤 면을 띄우려고 했는지는 알겠지만, 내용 자체는 전혀 유쾌하지 않다. 다만, 외려 그렇기에 당시 귀족과 부유층이 눈길을 준 작품이었다. 이는 그들 중 다수가 이런 욕망을 꿈꾸거나, 일찌감치 경험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훔친 키스, 1780년대, 캔버스에 유채, 45x5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훔친 키스, 1780년대, 캔버스에 유채, 45x5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여자가 남자의 입술에 볼을 대고 있다. 남자가 나온 곳은 발코니. 둘은 비밀 연인일까. 이들의 모습을 볼 때, 남들에게 당당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인은 크림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다. 오른편 문틈 너머에선, 그녀처럼 우아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예를 갖춰야 할 행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엄숙해야 할 분위기에서 빚어지는 비밀스러운 돌발 상황. 이 또한 그 시절 부자들이 좋아했던 로코코풍의 야릇한 주제였다. 제목은 <훔친 키스>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770년경, 캔버스에 유채, 81.1x64.8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770년경, 캔버스에 유채, 81.1x64.8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그런 한편, 프라고나르는 <책 읽는 소녀> 같은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밤색 머리칼을 말아올린 여인이 책을 읽는다. 진한 콧날과 유연한 손가락, 노란색 드레스와 연보라색 리본에서 느껴지는 건 단정함 뿐이다. 서두의 <그네>, 직전에 소개한 <빗장>과 <훔친 키스>와 다른 정갈한 작품이다. 사실, 프라고나르는 이처럼 다양한 화풍과 주제를 구사할 수 있었다. 단순히 ‘사치 화가’로만 낙인찍히기에는 아까운 실력이었는데….

그저 ‘퇴폐 화가’로 두기에는 아까운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러브레터, 1770년경, 캔버스에 유채, 83.2x6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러브레터, 1770년경, 캔버스에 유채, 83.2x6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다.

지금껏 로코코 화풍 그림처럼 향락에 젖었던 옛 체제의 귀족과 부유층. 이들은 참다못해 터진 시민의 분노 아래 살얼음판에 서야 했다. 매일 피바람이 불었다. <그네>의 소유주 또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지경이었다. 세상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쉰일곱 살의 프라고나르도 급류에 휘말렸다. 그는 인기를 잃었다. 후원자도 여럿 죽거나 죽임을 당했다. 로코코 화풍의 유행 또한 멈추고 말았다. 로코코가 그린 사랑놀이는 이제 저급함으로 손가락질받을 뿐이었다. 혁명 직후 고개를 든 건 신고전주의 화풍이었다. 이는 로코코와 달리 교훈과 도덕을 강조하는 양식이었다.

프라고나르도 당연히 그런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옛 행보가 발목을 잡았다. 그간 주문 제작했던 로코코풍 그림을 잘 그려도 너무 잘 그렸다는 것. 이게 문제였다. 세상은 그를 ‘가장 로로코적인(로코코적이었던) 화가’ 정도의 틀에 가두려고 했다. 물론, 이런 상황이 펼쳐진 데 대해선 그 또한 일부 자초한 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마르그리트 제라르, 사랑받는 아이,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44x55cm, 포그 박물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마르그리트 제라르, 사랑받는 아이,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44x55cm, 포그 박물관



1792년, 프라고나르에게 주어진 건 박물관 행정 업무였다.

프라고나르는 그 일을 8년가량 했다. 그의 이름은 흐릿해지고 있었다. 결국 1806년, 그는 과거 영광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사인은 뇌졸중, 당시 나이는 일흔넷이었다. 프라고나르는 직후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종적을 감췄다. 심해에 잠긴 그를 끌어올리기에 나선 건 19세기 중후반의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교훈의 시대가 저물고, 재차 아름다움의 세상이 도래하던 때였다. 그 무렵 몇몇 화가들 사이에서 프라고나르의 그림은 한물간 과거가 아닌, 먼저 온 미래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발칙하리만큼 솔직했던 붓질 또한 그때부터 꾸준히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프라고나르를 그저 ‘퇴폐 화가’ 정도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하지만 프라고나르가 씁쓸하게 생을 마감하던 그 시절,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의 로코코 회화가 로스차일드와 프릭 등 거부들의 수집품으로 다시 주목받을 것이라곤. 당장 어느 미술관의 자랑이 되고, 대형 전시의 대표작으로 당당하게 소개되리라곤. 입는 옷, 머무는 집, 심지어 먹는 음식에도 극도의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요즘. 그의 그림은 어제보다 오늘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

참고 자료
Fragonard, Satish Padiyar, Reaktion Books

Jean-Honore Fragonard, Calosso, Maggiorino.,Goncourt, Edmond.,Goncourt, Jules., Parkstone Press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마르그리트 제라르, 첫걸음,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44.5x55cm, 포그 박물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마르그리트 제라르, 첫걸음,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44.5x55cm, 포그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