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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어른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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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어른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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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어른은 언제 되는 걸까요?” 학생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주민등록증 나오면!” 호기롭게 대꾸하는 이도 있었다. 학생의 눈빛을 바라보니 그렇게 간단히 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질문이 나를 향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일까? 당당하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작게 도리질을 쳤다. “저는 결정을 내린 후, 그 결정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황급히 교문을 나서는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결정을 내리는 데 애를 먹는 것은 물론, 그 결정에 책임을 제대로 졌는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결연하게 답할 수도 없었다.

성인이 된 후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려왔다. 그 결정으로 인생의 경로가 바뀌기도 했다. 좋든 싫든 몸담은 곳에서 성실하게 일했으므로 책임을 다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쾌하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서른’이라는 시에 나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어른은 다 자란 사람이란 뜻이다/ 한참 더 자라야 할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소화가 안 되는 병에 걸렸다.” 다 자랐으니 성인일 테지만, 아직 어른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물학적으로 성인이라고 해서 모두 인간으로서 어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되는 데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못 갖춘 어떤 것이 필요할 듯싶었다.

어른의 조건이 있을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지 한참 생각하다 내가 생각하는 큰어른인 고 황현산 선생님의 책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난다, 2019)를 펼쳤다.

어른은 이렇게 생각하지, 말하지, 삶을 살지… 어른에 다가가고 있다고 느끼던 찰나, 선생님이 2015년 1월29일에 남기신 글을 읽었다. “내가 살면서 제일 황당한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직업을 갖고 애를 낳아 키우면서도, 옛날 보았던 어른들처럼 나는 우람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고 늘 허약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늙어버렸다. 준비만 하다가.” 여기서 어른을 향한 추적은 중단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 또한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니, 어쩌면 어른이라는 칭호는 외부에서 부여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되었음을 깨닫는 데서 오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된 김에 어른의 조건을, 어른값을 손수 찾기로 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아닌 ‘책임을 지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어른이다. 무엇보다 한데 고여 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편견은 위험을 피하게도 해주지만 변화 앞에서 문을 닫아걸게도 한다. 어른이라면 각인을 곧장 낙인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게 품이다. 그릇이다.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진짜 어른은 편견으로부터 멀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도 한데 어울려 놀 수 있는 아이처럼, 다시금 투명해지는 것이다. ‘경험 없음’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유년 시절이었다면, ‘경험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다시금 가능케 만드는 사람이 어른이다. 그래서 진짜 어른은 저런 말을 한다.


몇년 전에 토킹 스틱을 선물받았다.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족은 회의할 때 토킹 스틱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만 발언권을 주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거나 방해하지 못하도록 규칙을 정한 것이다.

토킹 스틱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먼저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그런 다음 상대를 이해시켜라.” 말로 하기엔 어려운 일이지만, 말로써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능력, 어른값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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