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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도 유통기한이 있다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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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도 유통기한이 있다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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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통치(run)하고 베네수엘라에 매장된 석유를 활용할 것이라고 밝힌 3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전쟁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석유를 위한 전쟁 반대’ ‘카리브해에서 미국은 나가라’ 등의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AFP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통치(run)하고 베네수엘라에 매장된 석유를 활용할 것이라고 밝힌 3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전쟁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석유를 위한 전쟁 반대’ ‘카리브해에서 미국은 나가라’ 등의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AFP 연합뉴스




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새해니까, 아무래도 냉장고를 정리한다. 냉장실에 넣어두면 반영구적일 것 같고, 냉동실에 넣어두면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음식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되지만. 묵은 것은 묵을 뿐이고 상할 것은 냄새를 풍기지 않을 뿐이다. 한해를 살며 고양이 세수하듯 한두번 정리하는 흉내를 내보긴 했지만, 해의 끝자락에서 냉장고는 겨우 반찬 몇개 들어갔다 나올 공간만 남겨두고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하는 김에 찬장도 정리하자. 건조식품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은 냉장고에 대한 그것보다 훨씬 두텁다. 잘 뒤적이다 보면 유통기한이 3년쯤 지난 허브가 이제 그만 작별 인사하자며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묵은 것들을 뒤로하고 영롱하게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쉽게 작별을 고하지도, 쓸모를 다했으니 버려달라고 말하지도 않는 주방의 터줏대감들. 통조림이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많은 부분은 전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주방이라고 다를쏘냐. 사람을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도 ‘음식’은 살인병기만큼이나 중요했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은 전쟁터의 보급을 해결해야 했다. 그는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량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공모를 진행한다. 요리사였던 니콜라 아페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리병에 담긴 밀봉된 음식을 끓이면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 기술로 상금을 받게 된다. 후에 깨지기 쉬운 유리병의 단점을 영국이 보완하며 ‘통조림’이 등장한다.



군대의 보급품으로 시작한 통조림의 여정은 대량생산과 유통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가난한 이들의 간편한 끼니가 되어 슈퍼마켓의 한편을 당당히 차지하게 됐다. 우리 식탁의 단골손님인 부대찌개도 통조림과 전쟁이 만든 기분 좋은 아이러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삶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전쟁이 촉진하는 기술 발전을 보라.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드론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일과, 같은 기술로 웅장한 자연경관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유튜브 영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한다. 그간 공상과학 영화로만 접하던 기술들이 거짓말처럼 구현되는 장면들을 목격하며 신기하기도,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통조림 정도면 족하다. 인간의 삶이 아무리 불완전할지라도, 전쟁은 당연하지 않고 살인은 여전히 살인일 뿐이며 파괴는 언제까지나 파괴일 뿐이다.



새해 벽두부터 주권국가의 대통령 부부가 수도 한복판에서, 군대에 의해 삽시간에 납치당했다. 베네수엘라 이야기다. 더 이상의 전쟁은 용납하지 않겠다던 트럼프가 일으킨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다. 민주주의는 증언한다. 외부의 개입으로 꽃피는 민주는 없으며 총칼로 보장되는 영원한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냉동실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음식물 쓰레기가 다 녹아서는 악취를 내뿜는다. 너덜너덜할지언정 폐기되지는 않았던 합의들은 종이쪼가리가 되었고, 냉장고의 코드는 뽑혔다. 유례없는 위기 앞에 평화는 위태로우며 전쟁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이제는 부끄러움이 없다.



결국 통조림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저온살균에 튼튼한 알루미늄 외피를 둘렀다 한들, 세월 앞에 장사 없어 찌그러지고 녹슬면 내용물은 못 쓰게 된다. 폭력의 세계와 제국주의에 질서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치장을 해뒀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2026년이다. 우리가 알던 세계를 담아둔 통조림의 유통기한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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