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아프간 관리 실패했던 美
기득권 세력 압박해 통치 나설 듯
마두로, 아내와 함께 美법정 출석
기득권 세력 압박해 통치 나설 듯
마두로, 아내와 함께 美법정 출석
5일 베네수엘라 국회에서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 델시 로드리게스(왼쪽)가 국회 의장 호르헤 로드리게스(오른쪽)와 부의장 니콜라스 마두로 게라(가운데)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3일 ‘확고한 결의(Absolute Resolve)’ 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전격 체포한 이후, 미국의 베네수엘라 통치 구상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베네수엘라를 맡고 있다”며 직접 관할 의지를 천명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마두로 정권 2인자인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를 용인하며 실질적 협력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이는 과거 정권을 완전히 붕괴시킨 뒤 국가 재건에 실패했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현지 기득권 세력을 관리·통제하는 실리적 전략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마두로는 아내 실리아 플로레스와 함께 체포 이틀 만인 5일 미국 뉴욕 남부연방법원에 출석했다.
트럼프는 4일 “현재 베네수엘라를 누가 책임지고 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우리가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녀(로드리게스 부통령)가 협조하고 있다”면서도 “처신을 잘하지 않으면 우리는 2차 공습을 하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는 “그녀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마두로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측의 태도도 급변했다. 전날 “베네수엘라의 유일한 대통령은 마두로”라며 미국에 반발했던 로드리게스는 4일 텔레그램을 통해 “미국과 베네수엘라가 균형 있고 존중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순위”라며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면서 “공유 개발을 목표로 한 협력 의제를 놓고 함께 일하기 위해 미국 정부를 초대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압박 앞에서 정권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사실상 미국의 ‘가이드라인’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5일 미국 뉴욕 맨해튼 연방 법정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왼쪽)과 그의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출석하고 있다.법정 스케치 삽화./AP 연합뉴스 |
◇美 압박에 물러선 부통령… WP “루비오, 사실상 총독 역할”
같은 날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NBC 등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미국의 전략을 구체화했다. 그는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운영(run)’ 발언에 대해 “국가 자체가 아니라 ‘정책’을 운영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이 일일이 행정 업무를 맡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배경으로 마약 근절, 석유 산업 재편, 이란 영향력 차단 등 미국의 국익과 직결된 핵심 사안에서 베네수엘라가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수립 과정에서는 루비오 본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는 “루비오가 사실상 베네수엘라 ‘총독’(viceroy)을 겸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마두로 없는 마두로 정권’을 용인한 배경에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의 쓰라린 교훈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뒤, 집권 바트당 소속 군인과 관료를 전원 해고했다. 이는 숙련된 관료와 군인 40만명을 하루아침에 반미 무장 세력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어진 치안 공백은 이슬람국가(ISIS)의 발흥과 끝없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기존 통치 시스템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로드리게스를 비롯해, 마두로 충성파로 분류되던 군부와 관료 조직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행정 마비와 치안 공백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유력 야권 지도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배제됐다. 미국은 마차도가 가진 민주적 정통성보다는, 군부와 경찰 조직을 당장 통제해 치안 공백을 막을 수 있는 로드리게스의 장악력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는 로드리게스 대행 지지를 선언하며 조직적인 이탈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 설령 이들이 마약 카르텔(‘태양의 카르텔’)과 연루돼 있더라도, 당장의 안정을 위해 이들을 처벌하기보다 미국의 통제하에 두는 선택을 한 셈이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시도됐던 ‘국가 건설(Nation Building)’의 실패 또한 미국의 전략 수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다. 미국은 아프간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으나, 정통성 없는 친미 정부는 미군 철수와 동시에 탈레반에 의해 붕괴했다. 이를 의식한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사태에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명분보다 철저한 ‘미국 우선주의’ 실리를 앞세우고 있다.
실제 트럼프는 “베네수엘라는 죽은 나라”라며 “지금은 선거보다 망가진 나라를 복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못 박았다. 루비오 역시 “선거는 시기상조”라며 베네수엘라 야권이 아닌, 현 집권 세력을 협상 파트너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는 엑손모빌 등 미국 석유 기업들이 진출해 인프라를 재건하고 원유를 생산하는 데 있어 실무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다만 군사 압박과 현지 기득권을 동시에 활용하려는 미국의 ‘하이브리드 전략’이 순항할지는 미지수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로드리게스는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요구에 부응해 “존중하는 관계”를 언급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식민지가 되지 않겠다”는 정치적 강경 발언도 섞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로드리게스에게는 권력 유지를 위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국가 권력 구조가 아직 남아 있는) 기존 마두로 권위주의 정권을 떠받쳐야 하는 아찔한 외줄 타기가 기다리고 있다”며 “한 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내부 쿠데타나 거리 봉기가 촉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 빈민가를 장악하고 있는 무장 조직 ‘콜렉티보(Colectivos·친정부 민병대)’도 뇌관이다. 정규군 통제권 밖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로드리게스의 친미 행보를 ‘배신’으로 규정하고 독자적인 무장 투쟁에 나설 경우, 베네수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트럼프와 루비오가 ‘2차 공격’ ‘마약 운반선 공격’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로드리게스 체제가 내부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미국과의 협조 약속을 파기할 경우 트럼프 행정부는 다시금 대규모 군사 개입 딜레마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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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박국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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