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안성기가 배우로 데뷔한 이듬해 출연한 양주남 감독의 ‘모정’(1958). |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관객에게 가장 든든한 믿음을 주었던 안성기의 70년 가까운 연기 인생이 멈춰섰다. 고인은 2023년까지 혈액암 투병으로 부은 얼굴로도 이따금 공식 석상에 등장해 회복과 연기 활동에 대한 의지를 보였지만, 5일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1952년 1월1일생인 안성기는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실제 태어난 해는 1950년으로 전쟁통에 태어나 출생신고가 늦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아원을 무대로 한 이 영화에 출연할 아역배우를 찾던 김 감독은 서울대 재학 시절 함께 연극을 하던 친구이자 영화 기획자였던 안화영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안씨의 둘째 아들 안성기를 카메라 앞에 세웠다. 이 작품에서 함께 데뷔한 김지미(1940~2025)와는 김기영 감독의 차기작 ‘초설’(1958)에도 같이 출연했다. 안성기는 김 감독의 ‘십대의 반항’(1959)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역배우로 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배우로 활동하던 어린 시절을 평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 있어도 마음이 항상 조마조마했어요. 영화 관계자 아저씨가 느닷없이 학교로 찾아와 호출하는 경우가 많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죠. (…) 어린 시절이라 ‘레디’라는 신호까지 눈을 뜨고 있다가도 ‘고’라는 신호가 떨어지면 자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 제작진은 미제 초콜릿으로 유혹을 하든지 아니면 어른들이 하는 노름판에 끼어 넣어 잠을 쫓도록 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죠.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섯다, 도리짓고땡 등 당시 유행하던 노름에는 일가견을 갖게 되었어요.”
배우 안성기가 중학생 시절 출연했던 ‘얄개전’(1965). |
1968년 ‘젊은 느티나무’를 마지막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한 안성기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대입 준비를 해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뒤 대기업에 들어가 베트남 관련 업무를 하고자 했으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다가 1977년 아버지가 기획한 김기 감독의 계몽영화 ‘병사와 아가씨들’로 연기자로 복귀했다. 이후 몇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지만, 작품도 그의 연기도 주목받지 못했다.
다시 돌아간 영화계에서 좌절감을 맛볼 무렵 만난 영화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안성기의 팬이었던 배창호 감독이 이 영화 조연출을 하며 주연배우로 안성기를 적극 추천했다. 이장호 감독에게 촬영 현장에서 “한심한 놈아, 그게 연기냐? 그러고도 배우냐?” 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가 눈물을 흘렸다는 안성기는 “그때만 해도 나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는데 그의 독설과 열정이 나 자신도 모르게 나를 배우로 만들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검열을 뚫고 1970년대 한국 영화가 잃어버렸던 리얼리즘의 회복을 알린 이 영화에서 그는 시골에서 상경해 중국집 배달을 하는 덕배 역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다.
이후 이원세 감독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와 ‘안개마을’(1983) 등 작품성 뛰어난 문제작들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대학 졸업 뒤 돌아온 충무로에서 성인 배우 안성기의 존재를 알린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 |
배창호 감독의 연출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 출연하며 맺은 인연은 13편의 출연으로 이어지면서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로 1980년대 한국 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어나갔다. 1984년 이미숙, 가수 김수철과 함께 찍은 로드무비 ‘고래사냥’은 서울 관객 40만명을 동원하면서 그해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으로 이어가며 대중성과 작품성에서 눈부신 성과를 냈다.
성인이 된 뒤 임권택 감독과 배우 안성기의 만남이 걸작으로 완성된 첫 영화 ‘만다라’(1981). |
1970년대 멜로 영화의 미남 배우들과 달리 무기력한 소시민이나 고뇌하는 지식인,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없는 괴짜까지 새로운 인물형을 창조했던 안성기는 1980년대 영화계의 아이콘이자 새로운 시대, 다른 영화를 꿈꾸던 젊은 영화감독들의 페르소나였다.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9),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등 한국 영화의 혁신을 이끌고, 역사와 현실의 부조리를 스크린에 담아내려 했던 패기 넘치는 감독들의 데뷔작과 주요 연출작의 중심에는 모두 안성기가 있었다.
1984년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으로 안성기의 시대를 이끈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 |
안성기는 그 시절을 두고 “내 이미지가 그 시대와 일치했던 것 같다. 1980년대 작품 중 대부분은 사회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하고 싶은 말도 가슴 펴고 말하지 못하는 역할을 연기했다. 대개 그런 인물상을 원하고 있었고, 그것이 나라는 개성에 잘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회고했다.
안성기는 촬영 때 연기에 몰입하기 위해 캐릭터와 똑같이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만다라’를 찍을 때는 삭발한 채 집에서도 승복을 입고 먹고 잤으며, 빨치산을 연기한 ‘남부군’을 찍을 때는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 해진 군복과 군화 차림으로 후배 결혼식에 갔던 일이 회자됐다.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등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 남우주연상은 각각 8회, 5회를 수상하며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다. 2013년 경동중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던 조용필과 함께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나란히 받았다.
한국 영화의 금기와도 같던 빨치산을 소재로 만든 정지영 감독의 문제작 ‘남부군’(1990). |
주연배우로서의 승승장구는 코미디 장르로 연기 폭을 넓힌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와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등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 자신이 40대 후반에 들어서고 한국 영화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90년대 말, 안성기는 자신의 입지가 변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 주간지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고 처음 느꼈던 순간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무조건 주인공 아니면 특별출연으로 출연했는데, 이 작품의 배역은 작았다. 이때부터 배우의 욕심대로 작품을 할 수 없다는 걸 본격적으로 깨닫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당시 대배우 안성기에게 첫 조연을 제안하고 노심초사하던 이명세 감독은 안성기가 장고 끝에 수락하자 너무 기뻐 추운 날씨에 해운대 밤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안성기는 전처럼 단독 주연은 아니지만 ‘무사’(2001), ‘실미도’(2003), ‘묵공’(2006) 등에서 무게감 있는 조연 연기로 작품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고뇌하는 지식인, 선량한 소시민의 이미지에서 부패한 형사로 이미지 변신을 해 빼어난 코미디 연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 |
1990년대 말부터는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의 중심에 서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단장을 맡았고, 2006년에는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역임했다. 스크린쿼터 운동을 비롯해 사회적 현안에 적극적으로 발언하던 정지영 감독과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을 함께하며 사회 비판적 영화를 선택하던 배우에서 영화인의 사회적 책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영화인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좀처럼 거절 못하는 그의 성격도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이유가 됐다. 한국 영화 불법복제 방지 ‘굿다운로더 캠페인’ 공동위원장,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한국 영화 100년 기념사업’ 홍보위원장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숱한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름만 내어준 게 아니라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궂은 일까지 도맡아 하면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일하게 끝까지 거절했던 자리는 정권 바뀔 때마다 제안이 들어왔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주연배우였던 안성기가 악역인 조연을 맡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
고인의 연기 활동은 2023년 투병으로 중단될 때까지도 쉼없이 이어졌다. 60대 들어서도 2012년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 2014년 임권택 감독의 ‘화장’ 등으로 건재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한산: 용의 출현’(2022)에 이은 ‘노량: 죽음의 바다’(2023)가 마지막 작품으로 남았다.
34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환갑 배우 안성기의 관객 동원력을 다시 확인시켜준 ‘부러진 화살’(2012). |
한국 영화인 헌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안성기관’이라고 이름 지어진 서울 씨지브이(CGV) 압구정 아트1관 입구에는 흑백으로 그려진 그의 환한 미소 옆에 이렇게 적혀 있다. “안성기에 대한 한국인의 유례없이 오랜 애정은 여느 스타에 대한 열광이나 숭배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우정에 가까운 감정이다. 우리가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달려왔다고 생각하고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면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있던 자리에 있다. 주름이 조금 늘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조선 장군 어영담으로 출연한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2022). |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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