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생존의 연대]<2-⑫>
오독립 규슈대학교 학술연구원 인터뷰 "일본은 분리가 기본, 한국은 분단적 갈등 구조"
일본은 우리에게 익숙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오해가 많은 이웃이다. 느린 사회, 책임을 회피하는 나라,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 감정을 숨기는 사람들 같은 이미지들은 한국 사회에서 거의 상식처럼 소비돼 왔다. 그러나 이런 통념들은 일본 사회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에 가깝다.
일본 사회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관계 개선과 실질적인 경제 협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수다. 최근 한일 양국 정부가 관계 정상화와 협력 복원을 추진하고 있지만 제도와 정책 이전에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다. 일본 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갈등을 피하며,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고, 어떤 기준으로 행복을 추구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정치적 합의도, 경제적 협력도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일본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의 오독립(吳獨立) 학술연구원을 만나 일본 사회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한 오 연구원은 한국 사회의 경험과 일본 사회에 대한 현지 연구를 결합해 양국 사회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춘 연구자다. 그는 일본 사회를 '느리다'라거나 '보수적'이라고 단정하는 대신 "책임질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한다.
오독립 규슈대학 학술연구원 /사진=조철희 기자 |
오 연구원은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분리'를 제시했다. 개인과 조직, 감정과 역할, 사적 관계와 공적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일본의 사회적 문법은 한국 사회의 '분단적 갈등 구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일본의 인내, 관용, 친절 등의 의도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일본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사회가 아니라 해결 주체가 누구인지 먼저 따지는 사회다." 오 연구원의 이 말은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일본의 복지 제도, 격차의 체감 방식, 젊은 세대의 정치 인식, 그리고 '혼네'(本音·속뜻)와 '다테마에'(建前·겉말)로 상징되는 관계 문화까지, 오 연구원과의 인터뷰를 일본 사회의 표면이 아닌 구조를 들여다봤다.
이 인터뷰는 일본을 미화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인터뷰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고, 때로는 잘못 알고 있었던 일본 사회의 실제 모습을 차분히 짚어보려는 인터뷰다. 일본을 이해하는 일은 곧 한국 사회를 다시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해 위에서 비로소 한일 관계 개선도, 실익 있는 경제 협력도 현실적인 논의로 나아갈 수 있다.
다음은 오 연구원과의 일문일답.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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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덜 무너지는 일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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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본은 '느린 사회'로 인식됩니다. 일본 사회의 속도가 느려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평가는 타당합니까?
▶한국은 문제가 생기면 법을 먼저 만들고 시행하면서 수정·보완하는 방식이 강합니다. 유권자 요구가 즉각 정치로 연결되다 보니 '빠른 입법'이 작동합니다. 반면 일본은 지방에서 조례·규칙으로 먼저 시험 추진하고, 효과와 문제를 충분히 파악한 뒤 최종 단계에서 법을 제정합니다. 그래서 체감 속도는 느려 보이지만 막상 법이 나오면 제도가 이미 상당히 정제돼 있습니다. 일본의 느림은 꼼꼼함이기도 하지만 제도를 확정하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이 강해 검증을 길게 가져가는 측면이 큽니다.
-그러한 책임 문화가 일상이나 정치에선 어떻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책임을 확실히 질 수 있을 때만 움직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컨대 한국은 고객센터에 불만을 제기하면 불편 자체에 먼저 사과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은 잘못이 확정되기 전에는 사과를 유보하는 일이 흔합니다. '스미마셍'도 한국식 사과라기보다 '실례합니다'에 가깝습니다. 사과는 곧 책임의 시작이기 때문에 범위가 불분명하면 아예 선을 긋는 것이죠.
정치에서도 최종 책임이 한 곳에 응축돼 있다기보다 구조적으로 분산돼 있고, 총리도 국민이 선출한 인물이 아닌 다수당 대표 성격이 강해 책임의 무게가 제한적입니다. 한국은 퇴임 후 대통령에게도 정치·역사·사법적 평가가 이어지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은 편이라는 점에서 책임을 지는 방식이 다릅니다.
-일본 시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실제 체감은 어떻습니까?
▶정치에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분리'가 기본입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에만 관여하려 합니다. 조직 안의 역할과 개인의 삶을 분리합니다. 조직 안에서는 규칙이 불합리해도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견이 다른 집단과도 굳이 싸우기보다 동조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강합니다. 반면 한국은 분리보다 '분단'에 가깝죠. 의견이 다른 상대에게 적대성이 커 갈등이 쉽게 증폭되는 사회 구조입니다.
-일본 사회는 개인의 욕망이 약하고 경쟁이 덜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욕망이 없다기보다 욕망의 형태가 다릅니다. 한국은 대기업·중소기업 격차처럼 '모 아니면 도' 구조가 강해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삶의 조건이 크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욕망과 경쟁이 강제됩니다. 일본은 중소기업도 비교적 지속 가능하고, 그 임금으로도 생활·교육이 가능한 경우가 많아 조금 내려와도 살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는 엔저와 물가 상승으로 생활이 팍팍해지고 임금 인상 속도가 못 따라가면서 젊은층의 위기감이 정치적 관심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징후도 보입니다.
-한국은 '격차 사회'라는 말로 상징되는 데 일본도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큰 문제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격차 사회라는 말은 일본에서 먼저 유행했습니다. 버블 붕괴 이후 정규직-비정규직 격차가 커지고 종신고용이 흔들리며 '니트'(NEET·구직 단념자) 현상 등이 부각되면서 격차 담론이 확산됐습니다. 다만 한일을 비교하면 일본은 격차가 있어도 저점이 상대적으로 높아 최악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덜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일본에도 빈곤층은 있지만 사회보장이 일찍 자리 잡아 최소한의 안전망이 비교적 잘 작동해 왔다는 점이 한국과의 차이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경제적 빈곤보다 고립·우울 같은 심리 요인이 더 크게 거론되는 편입니다.
-일본의 복지 시스템은 어떻게 형성됐습니까?
▶일본은 복지제도 도입이 빨랐습니다. 출발점은 전쟁 이후 군인·유가족 보상과 연금이었고, 전후 재건 국면에서 국가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을 조기에 정착시켰습니다. 고도성장기에는 종신고용을 바탕으로 기업이 복지 역할을 크게 떠안으면서 일본식 복지가 굴러갔습니다. 하지만 버블 붕괴 이후 기업도 국가도 부담 여력이 줄었고, 고령화가 겹치며 의료·연금 지출 압박이 커졌습니다. 최근 흐름은 복지를 축소하고 수익자 부담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제도가 바뀌는 데 대한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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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준이 다른 한국과 일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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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감정을 숨기고 관계를 피로해 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실제는 어떻습니까?
▶집단주의 경험이 있는 사회라면 이런 현상은 어디든 있습니다. 핵심은 일본인들이 '관계를 피한다'기보다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를 분리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은 일을 하려면 먼저 나이·가족 등 개인 정보를 교환하며 관계를 트는 문화가 강하지만 일본은 일이 먼저, 관계는 나중입니다. 업무에서는 역할과 규칙을 지키면 충분하고, 함께 일하며 시간이 쌓여야 개인적 친분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동료끼리도 개인 휴대폰 번호를 모르는 경우가 흔하고, 갈등이 있어도 일을 감정으로 끌고 가지 않는 편입니다.
-일본인의 인내는 미덕입니까, 구조입니까?
▶저는 일본인들의 인내를 자발적 미덕보다 강요된 인내로 봅니다. 일본은 '쿠키'(空?·공기)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 강해 규칙을 어기면 얻는 이익이 적고, 시선과 불이익의 리스크가 크다고 여겨 따르는 쪽을 선택합니다. 몇 걸음 안 되는 매우 짧은 횡단보도에서도 차가 없어도 빨간불이면 기다리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취업 준비생의 검은 정장처럼 규정이 명문화돼 있지 않아도 '다들 그렇게 하니' 따르게 되는 문화가 작동합니다.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을 접해 보면 일본 사회가 꽤 관용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의 관용은 '따뜻함'이라기보다 분리와 규칙 위에서 작동하는 관용입니다. 공적 영역에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개인감정보다 사회적 의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친절하고 완충이 잘 되는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곧 개인이 자기 몫을 희생하며 배려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해진 룰 안에서는 친절과 관용이 안정적으로 작동하지만 룰을 넘어선 추가적 배려는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중 누가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요?
▶일본인들은 겉보기엔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작은 할인에 민감한 모습 등이 '불행해 보임'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행복을 누리려면 특정 조건을 획득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해 행복과 불행이 극단적으로 갈리고 경쟁이 과합니다. 일본은 기준이 상대적으로 낮아 재미는 덜할 수 있어도 '살아지는 삶'이 가능하고, 그 안에서 일상의 만족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두 사회의 차이는 행복의 유무가 아니라 행복의 기준과 경로의 차이라고 봅니다.
-한일 간 역사 인식 갈등 문제는 왜 이렇게 풀기 어려운 것일까요?
▶우리가 '일본이 사과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 일본의 주체가 불명확하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사과해야 한다는 일본인들도 있지만 그것이 문제 해결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총리가 사과해도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이 문제가 단일 주체로 정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태평양 전쟁에서 진 것을 '패전'으로 인식하지 않고 '전쟁이 끝났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고, 전쟁 책임도 국민 전체보다 일부 군부로 분리해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인식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사과만 요구하면 논의는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해결 프레임으로만 접근하면 한계가 크고, 먼저 서로의 과거를 정확히 아는 것이 출발점이 돼야 합니다.
후쿠오카(일본)=조철희 기자 samsara@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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