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돌봄 공백에 성업
급식 맛집 학원들
돌봄 공백에 성업
급식 맛집 학원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워킹맘 이모씨는 지난달 초등학교 3학년 딸의 겨울방학을 앞두고 동네 사설 학원을 싹 뒤졌다. 검색 키워드는 어떤 과목이냐가 아니라, ‘점심밥을 주느냐’였다.
‘밥 나오는 영어 캠프’ ‘점심 제공 수학 특강’ ‘관장 사모님이 밥 해주는 태권도 학원’….
이씨는 “이전 정부가 약속했던 늘봄학교가 대폭 축소되면서 이제 학교 돌봄은 끊겼고 지자체 보육기관도 대기가 길어 엄두를 못 낸다”며 “아직 어리니 낮에 안전하게 머무르면서 점심 한 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아무 학원이라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밥 나오는 영어 캠프’ ‘점심 제공 수학 특강’ ‘관장 사모님이 밥 해주는 태권도 학원’….
이씨는 “이전 정부가 약속했던 늘봄학교가 대폭 축소되면서 이제 학교 돌봄은 끊겼고 지자체 보육기관도 대기가 길어 엄두를 못 낸다”며 “아직 어리니 낮에 안전하게 머무르면서 점심 한 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아무 학원이라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 송도의 박모씨도 방학을 맞은 초등 4학년 아들을 태권도·피아노·영어 학원과 공부방 등을 요일별로 돌려가며 보낸다. 역시 ‘밥 주는 학원’으로만 골라 구성했다. 단체 도시락을 시켜주는 곳도, 주먹밥이나 삼각김밥을 만들어 먹이는 곳도 있다.
그는 “맞벌이는 방학마다 헬게이트(지옥문)가 열린다. 작년까지는 1시간 일찍 일어나 보온 도시락에 아이 점심을 싸놓고 출근하거나 동네 분식집에 선결제해 놓고 가게 했다”며 “여럿이 모인 학원에서 반찬 갖춘 밥을 먹이는 건 매력적인 선택지”라고 했다.
이전 정부에서 약속한 늘봄학교 확대 정책이 철회되면서, 초등학교 3학년 이상 학생과 학부모는 '돌봄 절벽'에 맞닥뜨리게 됐다. /그래픽=백형선 |
긴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이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K 학교 무상급식’이 두 달 넘게 끊긴다는 뜻. 그 심리적 낙차는 꽤 크다.
집에 있는 부모는 ‘돌밥돌밥(돌아서면 밥 차리기)’에 지치고, 일하는 부모는 배달 음식이나 인스턴트 간편식으로 자녀의 끼니를 돌려막다 결국 커리어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맞벌이 가정은 급증하는데 공공 돌봄은 되레 약화된 요즘, 텅 빈 집이나 편의점에서 혼자 식사하는 아이들은 영양 불균형, 각종 안전사고와 범죄, 스마트폰 중독 위험에 노출된다.
이런 방학 중 돌봄 절벽이 ‘밥 주는 학원’이란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학원이 밥을 준다? 진짜다. 과거 대입 재수 기숙학원에서나 식사를 제공했다면, 요즘 초·중·고교생 학원에서 방학 중 ‘돌봄 기능’을 자처하며 밥 먹이는 곳이 늘었다.
태권도 학원들은 방학 중 운동과 수련 특강 뿐만 아니라 점심, 돌봄, 다른 학습 지도까지 해준다는 '풀코스'를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 캡처 |
예컨대 이런 식이다. 경기도 김포의 아파트 단지에서 태권도 학원 한두 곳이 ‘점심 포함 방학 줄넘기 특강’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다른 도장들이 아침부터 버스로 픽업해가 공부 봐주고, 운동시키고, 배달 도시락으로 점심 먹인 뒤 집에 데려다 주는 ‘풀코스 태권도’를 선보였다.
수강료가 월 17만원에서 50만원으로 3배가 됐지만 자리가 없었다. 이젠 인근 미술·음악과 교과 학원까지 연합해 ‘전과목 세트 코스’를 짜서 원생을 공유하고 점심밥을 학원끼리 돌아가며 제공하고 있다.
저출산과 불황에도 밥을 고리로 활로를 찾는 게 요즘 사교육계다. 대전의 한 초·중학생 대상 영어 학원은 “최대한 오래 데리고 있겠습니다”는 광고 문구로 부모들을 유혹한다. 방학 때만 수학·국어 강의를 추가 개설해 종일 수업을 하면서 뷔페식 점심과 간식까지 준다.
위례의 한 바둑 학원 관계자는 “바둑 인기가 줄어 고심했는데, 방학 때 오전 교습을 마치고 아이들을 인근 식당에 데려간다고 하자 원생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사실상 밥에 바둑을 끼워 판 수준이다.
밥이 포함되면 당연히 학원비가 비싸진다. 도시락 값과 배달료 등 실비에 더해, 학원 체류 시간과 관리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서울 대치동의 한 유명 영어학원은 주중 5시간씩 하는 초등생 방학 캠프 수강료가 월 200만원 선인데, 이 중 25~30%가 점심값으로 책정돼 있다. 대형 학원들은 유명 케이터링 업체와의 계약을 내세워 수강료를 올리기도 한다.
“학부모 부담을 덜어드리겠다”며 초·중·고교 원생들에게 직접 점심을 해먹인다는 한 보습학원. /온라인 캡처 |
식당·도시락 업체 같은 배후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선 학원에 주방을 차려 놓고 원장 등이 직접 밥을 해 먹이는 곳이 많다. 부모에게 식단표를 미리 제공하고 아이들 밥 먹는 사진을 보내준다. 아예 간판을 ‘밥드림학원’ ‘미스터밥학원’ ‘밥잘주는학원’ 등으로 바꾸기도 한다.
밥 주는 학원은 급식 관리의 사각지대다. 사교육 시설은 학교급식법 대상이 아니어서 교육부나 지역 교육청이 간여하지 않는다. 식품위생법상 50명 이상 단체 급식은 당국에 신고해야 하지만, 영세한 학원이 많은 데다 급식 인원이 50명이 넘어도 자진 신고하는 경우는 드물다.
2023년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밥을 먹은 원생들이 집단 식중독 증세를 보인 일이 잇따랐지만 유야무야됐다. 어떻게든 자식을 가르치고 따뜻한 밥까지 먹이겠다는 부모 마음은 그 무엇도 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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