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55년간 마르지 않은 ‘샘터’… “맑은 물 그대로 돌아오겠다”

조선일보 이옥진 기자
원문보기

55년간 마르지 않은 ‘샘터’… “맑은 물 그대로 돌아오겠다”

서울맑음 / -3.9 °
[아무튼, 주말]
[이옥진 기자의 진심]
잠시 쉼표 찍는 월간지 ‘샘터’
샘터지기 김성구 발행인
서울에 사는 40대 직장인이자 두 아이의 엄마, 부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60대 초반 가장, 식품 회사에서 품질 관리를 담당하는 50대 직장인, 무탈한 삶을 소중히 여기는 20대 직장인, 경기도 화성에 사는 70대 할머니, 광주광역시에 사는 30대 작가 지망생….

1970년 4월 창간한 국내 최장수 교양지 월간 ‘샘터’의 필진 상당수는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이다. 독자가 곧 필자인 이 잡지는 멋 부린 글보다 정직한 삶의 기록을 앞세웠다. 화려한 성공담 대신,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지면을 채웠다. 그 곁에는 수필가 피천득,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소설가 최인호, 장영희 교수, 동화작가 정채봉 등 스타 작가의 글이 나란히 실렸다. 샘터는 평범한 삶과 이름난 목소리가 한 지면에서 만나는 드문 잡지였다.

“인터넷,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잡지를 비롯한 종이책은 그 기능이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손바닥만 한 핸드폰은 모든 것을 흡입해 버렸지요. … 안타깝고 또 아쉽지만 2026년 1월호 샘터를 기점으로 휴간코자 합니다.” 샘터사의 대표이자 잡지 샘터의 발행인 김성구는 2026년 1월호에 이렇게 적었다.

한동안 마지막이 될 샘터를 인쇄하던 날, 김성구(66) 발행인을 만났다.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사무실은 소박했다. 마주 앉은 그의 표정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샘터의 전성기를 얘기할 때는 목소리가 밝았지만, 경영자의 책임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말끝이 느려졌다. 독자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이 붉어졌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불쾌함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사실상 폐간’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이죠. 회생의 여지를 남기는 것과 목숨을 딱 끊어버리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잖아요?” 울적한 얘기만 오갈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샘터는 55년 동안 이어온 역사도 있고, 추억도 있고, 삶의 지혜와 진리가 담긴 잡지입니다. 지금도 그 자존감만큼은 여전하죠. 솔직히 말하면, 설레기도 합니다. 당분간은 단행본 출판에 집중하면서 실력과 힘을 모을 생각이에요. 전혀 훼손되지 않은 샘터의 정신을 맑은 물 그대로 냉동창고에 넣어뒀다가, 때가 되면 다시 꺼내려는 겁니다.”

서울의 한 서점을 찾은 독자가 월간 '샘터' 2026년 1월호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서울의 한 서점을 찾은 독자가 월간 '샘터' 2026년 1월호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누적 적자 100억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휴간 이유는 재정난 때문인가요.

“샘터 잡지는 제가 1995년에 입사했을 때부터 적자였어요. 30년 동안 얼추 누적 적자가 100억원 정도 됩니다. 어마어마한 적자를 단행본으로 메웠는데, 이제는 그마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단행본도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집은 예전에 처분했고, 마이너스통장까지 탈탈 털었는데….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입니다.”


―정기구독 회원이 몇 명이길래.

“그건 영업기밀이라…. 1월호를 1만 부 찍었습니다. 여기엔 국방부에 납품하는 책도 있고, 서점에 깔리는 것도 있고.”

―잘 나갈 땐 50만 부까지 찍었지요.


“1970년대에 그랬습니다. 이후 30만 부, 10만 부, 5만 부로 줄어들었지요. 대기업·관공서에 납품하던 것도 하나, 둘 끊어졌고요. 종이 잡지의 역할이 사라졌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겠지요. 예컨대 국방부 같은 경우, 요즘은 병사들이 저녁 시간에 휴대전화를 자유롭게 보잖아요. 책을 보는 병사가 거의 없는 거예요. 보험회사들도 한때 영업용으로 샘터를 많이 활용했는데, 그런 수요도 없어졌죠.”

샘터의 휴간 발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9년 10월, 창간 50주년을 앞두고도 휴간을 발표했었다. 지금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당시 휴간 소식이 알려지자 각계에서 온정이 답지했다. 많은 독자가 성금을 보내왔고, 정기 구독자가 2400명 늘었다. 우리은행 등 기업이 후원에 나섰고, 이해인 수녀는 신간 인세를 기부했다. 샘터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때와 지금은 다른가요.


“이번에도 많은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받은 전화만 100통은 넘을 거예요. 다들 힘을 보태면,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세요. 회복하는 듯하지만 결국 더 힘들어지는 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습니다.”

적자를 면하려고 외부 컨설팅을 받고, 표지 디자인을 바꾸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실패했다. 광고주에게 애걸복걸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했다.

―샘터 가격이 4800원인데, 값을 올릴 생각은 안 해봤나요.

“창간호 가격이 100원이었습니다. 아버지(김재순 샘터사 설립자)가 ‘담뱃값, 짜장면 값보다는 싸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그 기준으로 지금까지 온 겁니다. 가격을 올린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휴간 소식이 전해지자, 한 출판업자로부터 잡지를 인수하겠다는 제안도 왔다. “만나서 어떤 각오가 있는지 들어봤는데, 그분은 쉽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샘터는 맑은 물, 다시 말해 새로운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내는 잡지여야 합니다. 외양은 바뀌어도 본질은 바뀌어서는 안 되지요.”

―인쇄 매체의 명운이 다한 것 아니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인쇄 매체가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죠. 이제 그런 기능은 굳이 책이 아니어도 됩니다. 하지만 지혜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누가 던져준다고 바로 내 것이 되지 않잖아요. 지혜는 모래에서 사금을 찾듯, 천천히 들여다보며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런 점에서 잡지나 책, 신문 같은 인쇄 매체는 기능이 예전보다 쪼그라들지는 몰라도, 보석처럼 더 귀중하게 남을 것이라고 봐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옛 샘터 사옥.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DB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옛 샘터 사옥.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DB


◇샘터를 특별하게 만든 ‘3·3·3 원칙’

1994년 11월 샘터가 연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보내기’ 공모에는 한 달간 1만여 통의 편지가 접수됐다. “홍시 좋아하시는 우리 엄마. 이 세상 감나무 모두 없어질 때까지 사셔야 해요.” “생선장사 비린내 엄마, 버스 차창 너머 하굣길에 날 보셨다지! 당신을 보고도 얼굴 돌리던 딸년이 서러워 그렇게 우셨다면서요. 그날! 정말 엄마를 본 게 아니었어요.” “보름달이 뜨거들랑 바라보거라. 나도 지구 한쪽 편에서 너를 생각하며 달을 바라보겠다. 그러면 너는 외롭지 않을 거라던 엄마….” “아버지 장례식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며 아버지 산소에 가보았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 어머니. 어머니, 이젠 눈물 흘리지 마세요. 아버지를 닮은 이 아들이 있으니까요. 사랑해요, 어머니.”

―한 달에 1만 통, 대단했네요.

“호응이 정말 컸습니다. 보석 같은 글이 많았어요. 1970년대에는 잡지가 완판되면 또 찍고, 또 찍었다고 하더군요. 50만 부를 찍었는데, 그 시절엔 책을 돌려보는 문화가 있었으니 실제론 수백만 명이 봤겠죠. 당시 사무실에 매달 400~500통씩 독자 편지가 왔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샘터에 자기 글이 실리면 ‘가문의 영광’이라고들 했습니다.”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을까요.

“그땐 매체 자체가 많지 않았어요. 샘터 같은 잡지는 아예 없었죠. 아버지가 한국기능올림픽 위원장을 맡아 기능공들을 만났는데, 다들 스스로를 ‘부모 잘못 만나 벽돌이나 쌓고 이발이나 한다’고 생각하더래요. 그때가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막 시작할 땐데, 사람들에게 자긍심과 자신감을 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아버지께서 샘터 발간을 결심하신 거예요.”

샘터는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를 표방하며 출발했다. 창간 발행인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창간호에 이렇게 썼다. “평범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벼운 마음으로 의견을 나누면서 행복에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샘터를 내는 뜻입니다. (중략) 샘터는 거짓 없이 인생을 걸어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정다운 마음의 벗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샘터는 왜 특별했나요.

“‘3·3·3 원칙’ 때문이 아닐지…. 지면의 30%는 글로 밥을 먹고 사는 글쟁이들이, 30%는 글솜씨가 있는 일반인들이, 30%는 글과는 거리가 있지만 인상 깊은 경험을 가진 이들의 사연을 기자가 대신 써준 것으로 채워집니다. 모두 동등하게 다뤄져요. 어디서 베낀 글이 아니라, 새로운 샘물 같은 글들을 싣죠. 샘터의 핵심은 일반 독자들이 삶의 경험을 진솔하게 써준 ‘행복 일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밋밋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삶이 담겨 있는 글에 함부로 조미료를 칠 수가 없죠. 남의 얘기 같지만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글들, 뭉클함을 넘어 가슴이 미어지는 글들이 톡톡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을 묻자 그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일흔이 넘어 글을 배운 할머니가 계셨어요. 배우지 못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구구절절 써서 보내셨죠. 말미에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쓰셨어요. 몽당연필로, 맞춤법도 틀린 채 원고지에 눌러 쓴 그 글을 읽고 한참을 울었어요. 글이 아니라, 인생을 통째로 내어주신 거예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말했다. “그런 분들께 미안합니다. 그분들께 기회를 드리고 터전이 돼온 게 샘터였는데, 지키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2004년 샘터사가 펴낸 대담집 ‘대화’ 출간 기념 사진. 왼쪽부터 법정 스님, 피천득 수필가, 김재순 전 국회의장, 최인호 소설가. /샘터

2004년 샘터사가 펴낸 대담집 ‘대화’ 출간 기념 사진. 왼쪽부터 법정 스님, 피천득 수필가, 김재순 전 국회의장, 최인호 소설가. /샘터


당대의 문인들도 샘터와 연이 깊었다. 최인호 작가는 소설 ‘가족’을 무려 35년간 연재했고, 법정 스님의 ‘산방한담’, 이해인 수녀의 ‘꽃삽’도 사랑을 받았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과 동화작가 정채봉,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의 글도 지면을 수놓았다. 샘터의 표지와 삽화에는 장욱진·천경자·이종상 등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실렸고, 샘터의 옛 사옥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소설가 한강을 비롯해 소설가 김승옥·윤후명·이태호, 시인 강은교·김형영·정호승 등도 샘터에서 일했다.

―샘터와 함께한 명사들의 공통점이 있다면요.

“솔직함. 겉과 속이 같은 분들이었어요. 속마음을 숨기거나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았죠. 특히 장영희 교수는 말과 행동과 글이 모두 같은 분이었고요. 피천득 선생이 아흔일곱에 돌아가셨는데, 장수 비결을 여쭤보니 ‘보기 싫은 놈 안 보는 것’이라 하시더군요.”

◇아버지보다 오래, 샘터를 지켜왔다

김성구 발행인은 2016년 작고한 창간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넷째 아들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 8년간 신문기자로 일하다, 서른다섯에 샘터사에 입사했다. 아버지보다 더 오랜 시간, 샘터를 책임졌다.

김성구 샘터사 대표에게 월간 ‘샘터’는 아픈 자식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팠죠. 늘 아팠죠…. 아프지만 너무나 귀중한 자식입니다.” 사진 속 작품은 금속 조각가 강은구가 옛 샘터 사옥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성구 샘터사 대표에게 월간 ‘샘터’는 아픈 자식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팠죠. 늘 아팠죠…. 아프지만 너무나 귀중한 자식입니다.” 사진 속 작품은 금속 조각가 강은구가 옛 샘터 사옥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일찌감치 가업을 이을 생각이었나요.

“전혀. 샘터에 애정이 크지 않았어요. 기자 생활 지겹고, 야근하기 싫고…. 솔직히 샘터에 쉬러 왔습니다. 그런데 샘터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를 바꿔놨어요. 평범한 삶, 소소한 일상을 감사하게 귀하게 여기는 분들을 만나게 됐죠. 그러면서 책을 만드는 게 좋아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는 샘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고 했다. “삶에서 불행의 시간은 길고, 행복의 시간은 짧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신께서 우리에게 행복의 순간을 놓치지 말고 제대로 살라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두신 게 아닐까 생각해요. 법정 스님도 허구한 날 ‘순간을 살아라’고 하셨거든요.”

―유년 시절의 꿈과 지금의 꿈은 무엇인가요.

“어렸을 적에는 007 제임스 본드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 지금 꿈은 죽는 날까지 책을 만드는 거예요.”

피천득 수필가(왼쪽)와 김성구 샘터 발행인의 모습. /샘터

피천득 수필가(왼쪽)와 김성구 샘터 발행인의 모습. /샘터


―피천득 선생의 책 ‘인연’을 내셨죠.

“샘터에 와서 처음 만든 책이에요. 제가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 손잡고 피 선생님 댁에 세배를 다녔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 한 달에 한 번씩 모시고 목욕탕에 갔고, 피 선생님께서 제 결혼식 주례도 서주셨죠. 기자 할 때 정채봉 선생(당시 샘터 편집장)과 같이 세배를 드리러 가서 ‘샘터에서 책을 내시라’고 했더니, ‘김 기자가 샘터로 가면 생각해 볼게’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샘터로 옮기자마자 ‘선생님, 기억하시죠?’ 했어요. 제가 선생님 글을 샅샅이 다 알거든요. 10분 만에 표지랑 제목이랑 다 만들었죠. 50만 부가 넘게 팔렸어요. 그때는 ‘내가 미다스의 손이구나’란 건방진 생각을 했죠.”

‘인연’을 비롯해 ‘TV 동화 행복한 세상’ 시리즈, 법정 스님 수필집 등 여러 단행본이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샘터의 경영난은 계속됐다. IMF 외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뒤에는 20년 넘게 근무한 경리 직원이 회사 돈을 빼돌리는 사건도 겪었다. 김 발행인은 2000년 샘터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2017년에는 상속세 부담과 적자 누적으로 동숭동에 있던 붉은 벽돌 사옥을 팔고 혜화동으로 옮겼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직원들 월급날이 가장 힘들죠. 휴간을 결정할 때도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직원들 생계가 달려 있는 일이니까.” (샘터 소속 기자들은 앞으로도 단행본 제작 부서에서 일을 이어간다. 샘터 출판사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성탄절에 샘터 1월호를 들고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지금 아버지를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누겠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아버지는 ‘수고했다’고 하시지 않을까요. 아버지도 생전에 샘터가 어려운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거든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나라가 얼마나 귀중한지 알았던 정치인이었고, 평범한 국민의 행복한 삶에 대한 철학을 가진 분이었죠.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 ‘목숨 걸고 약속을 지켜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셋을 지킨 다음엔 ‘멋대로 살아라’.”

샘터가 창간호를 재현한 특별 복간본을 발행한다. 이달 말부터 창간호와 2026년 1월호를 묶어 판매할 예정. 이번 기획은 휴간 소식에 아쉬움을 표한 독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샘터사는 전했다. /샘터

샘터가 창간호를 재현한 특별 복간본을 발행한다. 이달 말부터 창간호와 2026년 1월호를 묶어 판매할 예정. 이번 기획은 휴간 소식에 아쉬움을 표한 독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샘터사는 전했다. /샘터


―샘터가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요.

“평범한 삶과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귀중하고 감사한지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다는 것. 남녀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독자이면서 필자의 대상이 된 잡지가 샘터 말고 또 있나요?”

창간호부터 샘터를 구독해온 오두환(68)씨는 이렇게 말했다. “샘터는 단순한 잡지가 아니에요. 각색 없는 진실한 인생들이 담겨 있는, 우리나라 유일무이한 잡지이지요. 샘터 독자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김성구 발행인은 샘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실력을 키우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멀리 이민 가는 게 아니라, 잠시 옆 동네로 이사 간 것으로 생각해 주세요. 샘터는 항상 이웃처럼 곁에 있었으니까요. 언젠가 냉동인간처럼 반짝 일어나 인사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옥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