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일러스트=유현호 |
아프리카 최남단의 도시 케이프타운(Cape Town), 제가 찾아가 본 세계의 여러 도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입니다. 도시 북쪽에는 해발 1086m 높이의 바위산 테이블 마운틴이 도시를 포근히 감싸듯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기한 이름 그대로 산 정상은 일부러 평평하게 잘라 놓은 듯한 식탁이나 책상 모양입니다. 그 길이가 3㎞ 남짓으로, 구름이라도 살포시 끼면 마치 식탁보를 깔아 놓은 것 같아 정겹습니다. 다정한 사람과 함께 앉아 식사하거나 책을 읽으며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그 아래 펼쳐진 도시 너머엔 인도양과 대서양의 파도가 만나 일렁거립니다. 대항해 시대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인도양에서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변곡의 장소로 희망을 노래했을 희망봉도 그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평화와 희망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케이프타운은 각종 인종 차별 정책 관련 법률이 제정된 의회가 자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입법 수도입니다. 그 차별 정책에 따라 케이프타운 시민들은 법적으로 인종에 따라 거주지가 강제로 분리됐습니다. 예를 들면, 원래 흑인과 백인이 함께 섞여 살던 곳인 디스트릭트 식스(District Six) 지역이 1966년 백인 거주 지역으로 선포되면서, 수만 명의 유색 인종과 흑인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있는 로벤섬(Robben Island)에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정치범들이 수감된 감옥이 있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무장 투쟁으로 맞섰던 넬슨 만델라는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아, 27년의 수감 생활 중 18년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날마다 테이블 마운틴을 바라보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 같습니다. 1990년 국제사회의 압력과 내부 저항 운동의 결과로 석방된 그는 젊은 시절의 무장 투쟁을 접고, 보복보다는 용서와 화해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1994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20세기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이 됐습니다.
만델라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아프리카의 줄루어 ‘우분투(ubuntu)’에서 기인합니다. 우분투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존재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아프리카 전통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만델라는 이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해와 통합의 정치적·도덕적 원칙으로 삼아 실천했습니다. 그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우분투 정신은 다방면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정치나 기업 경영에서는 혼자 잘되는 것보다 더불어 잘되는 것을 지향하며, 권위적이 아니라 경청하고 협력하는 리더십이 강조됐습니다. 교육 분야에서는 상호 협력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동체적 의식과 도덕적 성품을 함양하는 교육을 지향하는 기본 원리로 작용했습니다. 국제관계에서는 평화 구축, 갈등 중재, 다문화 사회의 통합을 위한 기본 정신으로 활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정보 기술 분야에서는 소프트웨어를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아이디어까지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만델라가 세계적 지도자로 활동했던 시기에는 세상은 그래도 따뜻했고 평화로웠습니다.
병오(丙午)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대한민국이 평화로운 가운데 더욱 발전하고 온 국민이 행복한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기대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편협한 자기 확신과 자기들만의 이익 추구를 바탕으로 한 편 가르기가 횡행하고 증오와 보복으로 점철되는 정치권을 비롯한 일부 사회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태로는 모두가 불행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포용하고 연대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출발점이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우분투의 정신입니다. 하기야 우리에게는 우분투 정신을 포괄하는 더 위대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 있습니다.
아무튼, 독자 여러분!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김황식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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