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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한국이 대만의 반면교사인 이유

조선일보 타이베이=류재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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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한국이 대만의 반면교사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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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대만은 지난해 나란히 ‘사상 최대 수출 실적’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환율 시장의 풍경은 딴판이었다. 원화 가치 급락으로 패닉에 빠진 한국과 달리, 대만은 밀려드는 달러로 인한 자국 통화의 급격한 절상을 막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수출 대박이라는 출발선은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정반대 결말을 맞은 것일까.

대만의 경제 목표는 뚜렷하다. 수출 기업에 최대한 유리하도록, 자국 통화 가치를 ‘안정적인 저평가’ 상태로 묶어두는 것이다. 수출 호조로 달러가 유입되면 해당국 통화 가치가 오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수출 경쟁력을 위해 시장에 개입해 인위적인 달러 수요를 만들어 내며 자국 통화 가치의 상승을 막는다. 대만의 GDP 대비 외환보유고가 72.4%로 한국(22.2%)을 압도하는 것도 비상사태 대비 이상의 목적이 있다. 심지어 대만은 해외 투자 소득에 대한 공제 한도가 워낙 높아, 일반 개미 투자자는 연간 약 3억원 차익을 남겨도 사실상 세금을 내지 않는다. 환율 안정을 위해 국민의 달러 유출을 국가가 장려하는 셈이다. ‘서학 개미’에게 22% 세금을 물리면서도, 위기 시엔 환율 폭등 주범으로 몰아세우는 한국과는 다르다.

물론 대가도 있다. 기업 살리기에 ‘올인’한 청구서는 고스란히 국민 희생으로 돌아온다. 인위적인 고환율(자국 통화 가치 절하) 유도는 수입 물가 상승과 구매력 저하, 즉 팍팍한 민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졸 초임이 월 150만원 수준에 머물 만큼 임금 상승도 억누르고 있다. 사실상 내수를 포기하고 수출에만 ‘몰빵’한 결과, 나라는 부유하지만 국민은 가난한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국민의 큰 희생을 요구하는 이 시스템, 반복된 정권 교체에도 대만에서 수십 년 유지되는 이유는 뭘까.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은 그 답을 ‘반면교사’ 한국에서 찾는다.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는 것이 ‘소득 주도 성장’ 실험이 물가 폭등을 초래한 일이다. 선진국 반열에 오르겠다며 시장을 과도하게 개방한 탓에 위기 시에 환율을 통제할 수단을 잃어버린 한국의 상황도 그들에겐 교훈이 된다. 물가와 환율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해 즉각적 표심으로 정권을 심판하는 한국의 포퓰리즘 성향 역시 대만이 피하는 시나리오다.

한국에도 대만을 ‘수출 대박이 민생으로 이어지지 않는 실패 사례’로 경계하는 시선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 기반한 그들의 냉정한 결단을 그저 ‘나쁜 선택’으로 폄하할 수 있을까. ‘선진국’ 타이틀과 ‘억강부약’이라는 도덕적 명분에 취해, 경제의 최후 방파제인 환율과 제조업 경쟁력을 지키는 데 실패한 한국이 대만보다 더 훌륭한 길을 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대만은 언제든 한국의 길을 선택할 수 있지만, 한국이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는 대만 방식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타이베이=류재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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