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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소식을 알립니다”…79년 만에 명예 회복 ‘이관술 선생’ 고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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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소식을 알립니다”…79년 만에 명예 회복 ‘이관술 선생’ 고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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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후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 학살터에서 열린 ‘조선정판사 사건 재심 이관술 무죄 확정 고유제’에서 참석자들이 절을 올리고 있다. 최예린 기자

31일 오후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 학살터에서 열린 ‘조선정판사 사건 재심 이관술 무죄 확정 고유제’에서 참석자들이 절을 올리고 있다. 최예린 기자


“유세차 서기 2025년 12월31일, 이관술 선생께 조촐한 상 차려 아룁니다. 79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것은 아직 시작입니다. 선생의 진정한 명예 회복뿐 아니라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2025년 마지막 날, 마른 풀 덮인 골령골엔 제상이 차려져 있었다. 지난 22일 재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학암 이관술 선생에게 바치는 ‘고유제’(개인의 가문이나 나라에서 큰일을 치른 뒤 그 사정을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가 이날 오후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 학살터에서 진행됐다. 이날 고유제는 대전산내골령골피학살자유족회와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도 함께했다.



이 선생은 ‘조선정판사 사건’ 주모자로 몰려 1947년 무기징역이 확정된 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3일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골령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해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골령골에선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와 대전·충남 지역에서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이 우리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 최소 3천여명~최대 7천여명이 살해돼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골령골에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학암 선생도 묻혀 있는 것이다.



31일 오후 ‘조선정판사 사건 재심 이관술 무죄 확정 고유제’가 열린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 학살터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이관술과 항일혁명가들의 완전한 명예회복은 이제 시작’이라고 쓰인 펼침막들이 걸려 있다. 최예린 기자

31일 오후 ‘조선정판사 사건 재심 이관술 무죄 확정 고유제’가 열린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 학살터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이관술과 항일혁명가들의 완전한 명예회복은 이제 시작’이라고 쓰인 펼침막들이 걸려 있다. 최예린 기자


이날 고유제를 주관한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는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항일혁명가이자 해방 뒤 정치지도자로 민중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지만, 미군정 초기 경찰과 검찰이 조선공산당을 정치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불법 구금과 고문을 통해 조작 사건을 만들어 위조지폐범 주동자로 누명을 썼다”며 “오늘 우리는 그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뒤 끌려가 학살당한 골령골에서 79년 만의 ‘재심 무죄’라는 가슴 벅찬 소식을 갖고 고유제를 올리기 위해 여기 모였다”고 밝혔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술 선생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에서 중앙검열위원 겸 재정부장을 맡아 박헌영 다음 2인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과 검찰은 조선공산당 핵심 간부들을 1945년 10월~1946년 2월 근택빌딩에 있는 조선정판사에서 1200만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며 체포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 이후 남한에서의 공산당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31일 오후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 학살터에서 열린 ‘조선정판사 사건 재심 이관술 무죄 확정 고유제’에서 이 선생의 손녀 손옥희씨가 발언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31일 오후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 학살터에서 열린 ‘조선정판사 사건 재심 이관술 무죄 확정 고유제’에서 이 선생의 손녀 손옥희씨가 발언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2023년 7월 이 선생의 외손녀 손옥희(65)씨가 재심을 청구한 뒤 2년 뒤에야 개시된 지난 15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다. 지난 22일 재판부 역시 유일한 유죄 증거였던 공동 피고인들의 자백 진술에 대해 “사법경찰관이 자행한 불법 구금 등 직권남용죄 범행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며 이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손옥희씨는 이날 고유제에서 “79년 만에 진실이 밝혀져 기쁘지만,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며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했다. 손씨는 “나라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아끼지 않았던 할아버지에 대해 지금은 후손으로서 정말 감사하다”며 “재심 무죄 확정을 계기로 고인의 뜻을 계승해 우리나라가 정의롭고 나날이 발전하는 사회로 나아가길 기원한다”고 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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