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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 窓]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설득'이다

머니투데이 이기봉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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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 窓]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설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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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지난번에 인의(引儀·종6품) 이의신이 상소 한 장을 올리어 괴탄스러운 말을 마구 늘어놓았는데 국도는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가 길지(吉地)라고 한 것은 더욱 놀라운 말입니다. 이렇게 괴이한 말은 덕스러운 말만 들어야 하는 성상께 아뢰어서는 안 되므로 신들이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612년(광해군 3) 9월14일의 기사로 종6품 인의란 직책에 있는 이의신의 교하천도 제안에 대한 상소를 접수한 승정원에서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의 앞부분이다. 이의신은 이미 그 이전부터 지관(地官), 즉 풍수술사로 꽤 유명하여 왕실에서 무덤터를 잡을 때 여러 번 조언을 구한 인물이다. 하지만 승정원에서 상소를 접수하여 검토해 보고는 자체적으로 황당한 내용이라고 판단하여 보고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그리고서 겨우 수십 일이 지난 뒤에 또 와서 바쳤는데 그의 뜻과 태도를 보니 백일하에 요망스러운 설을 퍼뜨리면서 거리낌 없이 방자하였는바 반드시 그의 술책을 성공시킨 뒤에야 그만두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근거 없는 말들이 자자하여 인심이 흉흉합니다. 만약 본원(승정원)에서 정지시키고 말면 통렬하게 끊어서 그의 속셈을 징계시킬 수가 없을 것이기에 감히 접수하여 안으로 들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읽어보신 뒤 그의 죄를 엄하게 배척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수십 일 만에 두 번째 상소가 또 올라왔는데 이의신의 태도가 당당한 것을 넘어 방자했다는 것이다. 이의신의 직책이 겨우 종6품의 인의란 사실을 감안할 때 광해군과 모종의 합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러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승정원이 바로 그렇게 봤으며 그래서 임금이 직접 황당한 주장을 검토하여 이의신에게 죄를 주어 사건을 종결시켜 달라는 요청이다. 이때의 기록은 아니지만 광해군과 이의신이 나누었다는 대화가 이렇게 나온다.

"임금이 일찍이 지관 이의신에게 몰래 묻기를 '창덕궁은 큰일을 두 번 겪었으니 내 거처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는 노산(단종)과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유배됐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의신이 답하기를 '이는 고금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던 변고입니다. 궁전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운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빨리 옮기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일기' 1613년 1월1일의 기사로 창덕궁에 거주하던 광해군은 단종과 연산군처럼 혹시라도 쿠데타가 일어나 강제로 폐위될까 봐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고 이의신은 그 원인을 풍수의 관점에서 창덕궁터의 범위를 넘어 도성 전체의 문제로 설명하며 해소방법으로 천도를 건의하고 있다. 이의신이 상소를 두 번이나 올리는 상황 전개를 통해 볼 때 광해군이 이의신의 해법에 동의했고 구체적인 천도장소로 교하까지 받아들이는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교하천도는 국가적 정당성이 걸린 정치적·사회적 이슈가 아니라 광해군 자신의 심적 불안에서 시작됐고 그 불안이 인과관계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풍수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역사 속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봐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큰 결함이 보인다. 성공시키고 싶었다면 제안자를 종6품의 인의란 낮은 직책의 이의신으로 해서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옳건 그르건 고관대작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이의신에게 죄를 주라는 상소가 연일 올라왔고 광해군은 3개월 만에 죄만은 주지 않고 없던 일로 하는 것으로 끝냈다. 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신하들에 대한 치밀한 설득과정을 밟지 않은 명분 없는 조급한 시도가 어떤 결말로 끝나는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설득이고 훌륭한 정치는 치밀한 설득계획의 산물이다.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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