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에서 착안한 이른바 안나 카레니나 법칙은 행복은 여러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성립하지만 불행은 단 하나의 결핍만으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오늘은 2025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연말연시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불행한 진실을 직시해보아야 한다.
한국의 2024년 자살 사망자 수는 1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고 2025년 상반기에도 자살 사망자는 이미 7천 명을 넘어섰다.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 30년간자살로 숨진 사람은 34만 명에 육박한다.
하루 평균 40명, 36분마다 한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해온 셈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비극이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반복되고 누적된 국가적 재난이다.
2024년 사망원인 통계를 보더라도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하다.
10대부터 40대까지 전 연령층에서 사망 원인 1위가 자살로 나타났고 특히 40대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자살이 암을 앞질렀다.
그동안 고령층과 청소년층의 자살 위험은 꾸준히 지적돼 왔지만 이제는 중년층까지 위험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이는 자살이 특정 생애 단계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적 불안이 누적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한국인의 삶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傍證)이다.
OECD 자살률 통계를 보더라도 한국은 20여년간 불명예 세계 1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루 수십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현실은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사회 현상이 됐다.
이를 한국인의 정신적 취약성이나 문화적 특성으로만 설명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1897년 자살론(Le Suicide: Étude de sociologie)에서 자살을 개인의 병리라기보다 사회적 조건의 결과로 분석했다.
뒤르켐은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얼마나 연결돼 있는지 규범과 신뢰가 얼마나 작동하는지가 자살률과 깊이 연관돼 있다고 보았다.
사회적 통합이 약화되고 삶을 지탱하던 규범이 흔들릴수록 자살은 증가한다는 그의 통찰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정부는 자살예방법에 따라 5년마다 자살예방 기본계획을 수립해왔다.
2004년 제1차 계획 이후 20여 년 동안 다섯 차례의 국가 차원 자살예방기본계획이 추진됐고 현재는 2023년부터 제5차 계획이 진행 중이다.
생명안전망 강화, 자살 시도 이후 사후관리, 자살환경요인 관리, 지역 맞춤형 정책, 유족 지원, 자살유발정보 24시간 모니터링, 정신건강검진 확대 등 정책 항목은 매우 촘촘하다.
계획서만 놓고 보면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정책 설계가 비교적 정교해 보이는 이유는 해외의 주요 성공 사례들이 폭넓게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의 자살 예방 전략을 수립한 핀란드의 경험, 한때 한국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였으나 이후 급격한 감소를 이뤄낸 일본의 예방 인프라, 영국의 근거 기반 전문 심리상담 서비스(IAPT), 그리고 1987년부터 시행된 오스트리아의 자살보도 가이드라인 등이 모두 한국의 정책 설계에 참고되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실행이다.
지난 20여 년간 정부는 단 한 차례도 자살률 감소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정책의 방향은 정해졌지만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는 제한적이었다.
이는 자살 예방이 계획의 문제라기보다 예산을 포함한 정책 집행과 지속성에서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살 위험에 대한 정밀한 분석 없이 수치 중심의 목표가 설정됐고 이를 뒷받침할 예산과 인력, 제도적 기반은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다.
그 결과 정책의 실행력이 끝내 확보되지 못한 것이다.
2025년 8월, 대통령은 자살 문제를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하고 범정부 차원의 대응기구 설치를 지시했다.
자살률이 OECD 평균을 훌쩍 넘는 상황에서 자살로 내몰린 국민을 방치한 채 저출생 대책을 논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는 지적이었다.
이는 자살을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위기로 공식 선언한 것이다.
더욱이 자살예방은 보건복지부만의 과제가 아니라 고용·주거·노후·교육 정책과 연동된 범정부 차원의 문제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어 지난 22일 국무총리는 자살 예방을 내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자체·시민사회·종교계와의 연계를 강조하며 경제·고용·복지·교육·주거 정책이 분절되지 않고 긴밀히 연결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2026년에는 정부가 실효성과 지속성을 갖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자살 예방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자살예방정책은 정부가 개인의 죽음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은 버겁더라도 당신을 도울 제도가 있다", "당신의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국가적 신호를 분명히 보내는 일이다.
개인이 사회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연결망이 더욱 세심하고 온정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국민의 삶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삶의 의미가 사회 안에서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꾸준히 점검하고 보완해 나가야 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이 2026년부터는 자살 예방을 향한 한국 사회의 희망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제부터 내 삶은, 내 모든 삶은, 내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거야.
여기엔 명백한 선(善)의 의미가 있어." 최준호 충북대 국가위기관리연구소 방재사회시스템 연구센터장 국가재난,예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