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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엽의 법과 경제] 반도체 특별법을 통해 다시 본 '주 52시간 근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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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엽의 법과 경제] 반도체 특별법을 통해 다시 본 '주 52시간 근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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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반도체 특별법'은 우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반도체 클러스터 지정, 전력·용수 등 기반 시설 지원, 국가 보조금 지급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추진되고 있다. 이 법안은 12월 초 국회 상임위원회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를 통과해 현재 본회의 처리만을 남겨두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의 CHIPS Act, 중국의 반도체 굴기 등 주요국이 막대한 재정과 제도를 동원해 경쟁에 나서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위기 대응형 산업정책을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이 법의 취지는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통과된 법안에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이 빠졌다는 점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장시간 근로 관행을 개선하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며, 나아가 초과 노동을 신규 고용으로 전환하겠다는 취지로 2018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돼 왔다. 근로시간에 상한을 두어 법정 시간 안에서 집중적으로 일하고, 그 결과 남는 일자리가 다른 노동자에게 분배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장시간 노동에 의존해 온 한국 경제의 성장 방식에 대한 구조적 전환을 의도한 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실제로 기대한 효과를 내려면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노동자가 선호하는 노동시간과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시간이 모두 52시간 이하일 때에만 규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만약 노동자와 기업 모두 52시간을 초과한 근무를 선호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일률적으로 상한을 강제한다면, 일하려는 노동자는 일할 기회를 잃고 기업은 성과를 내기 어려워진다. 더 나아가, 초과 노동이 줄어들면서 생기는 '남는 일자리'가 실제 신규 고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추가로 채용되는 노동자가 기존 노동자와 유사한 숙련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산업별·직무별 숙련 격차가 큰 현실에서 이러한 조건이 항상 충족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근로시간 상한을 산업과 직무를 가리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한 점이 제도 도입 초기부터 큰 논란을 불러온 이유다.

이제 반도체 업계는 반도체 특별법을 계기로 주 52시간제의 예외를 다시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이해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와 실증 연구로 검증해야 할 사안이다. 다행히 시행 이후 약 7년이 지나면서 관련 연구들이 축적되었고, 최근의 실증 분석은 제도의 효과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첫째, 주 52시간제는 노동자의 조직몰입도에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삶의 만족도 개선 효과도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장시간 근로 관행이 실질적으로 개선되어 일과 삶의 균형이 달성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둘째, 기업 성과 측면에서도 부정적 신호가 관찰된다. 제도를 적용받은 기업들의 총자산이익률(ROA)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이 하락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는 입법 취지였던 생산성 향상이 현실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일자리 나누기 효과 역시 제한적이다. 신규 고용은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오히려 임시직과 일용직 고용이 감소해 노동시장 내 취약계층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주 52시간 근무제는 반도체 산업이라는 국가 전략산업을 위한 특별법 논의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규범으로 남아 있다. 반도체 산업은 기술 혁신 속도가 매우 빠르고 제품 수명 주기가 짧아, 칩 설계·시제품 개발·수율 안정화와 같은 국면에서 단기간의 몰입 노동이 불가피한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산업에서 획일적인 근로시간 상한은 연구개발의 연속성과 창의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크고, 제도의 부작용이 다른 산업보다 더 크게 증폭될 수 있다.

해외 경쟁 기업과의 비교도 우려를 키운다. 대만의 TSMC는 강도 높은 근로 문화로 유명하고, 미국과 일본은 고소득 전문직 연구개발 인력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면제(white-collar exemption)'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즉, 경쟁국들은 고숙련 R&D 인력에 대해서는 근로시간을 직접 통제하기보다 보상과 계약을 통해 조정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만이 엄격한 주 단위 상한을 유지한다면, 기술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산업과 직무 특성을 반영한 정교한 설계가 가능한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다. 반도체 특별법은 결국 한국 노동법이 고숙련 혁신 노동을 어떻게 제도 안에 포섭할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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