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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문학계에서는 인간과 인간 간 관계의 의미를 되짚는 작품을 다수 엿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이 우연한 기회로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은 물론이고,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함께 살아가던 타인에 대한 시기와 불신이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 또한 되짚는다.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또 동시에 미워하면서 결국에는 함께 살아가기를 택한다.
점차 파편화돼가는 현대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와의 만남과 그를 통한 위로를 추구한다.
'혼모노'란 일본어로 '진짜'를 뜻하는 단어다. 한때 인터넷상에서 '진상'이나 '오타쿠'를 조롱하는 신조어로 사용되며 널리 알려졌다. 저자 성해나는 본디 긍정적인 뜻을 지닌 이 단어가 변질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거짓일지라도 다수가 믿으면 진실이 되어버리는 지금의 시대상을 꼬집는다. '혼모노'는 대학 재학 시절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세태 풍자와 세대 갈등, 역사, 청춘과 욕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아우른다. 표제작 '혼모노'는 노쇠하면서 접신 능력이 약해진 박수무당이 영험한 젊은 신애기의 등장으로 '진짜'의 자리를 빼앗길 위기 속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박수무당은 가짜 무당으로나마 살아가려 진짜인 척 분투하지만, 모형 작두를 구하는 와중에도 선무당이나 하는 '오늘의 운세'만큼은 맡지 않으려 하고,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며 조소하는 신애기를 미워하면서도 그 집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마음을 쓴다.
저자는 일상적인 말투와 장면을 통해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무대에 올리고, 독자에게 명확한 판단을 제공하는 대신 그들이 스스로 진짜임을 증명하려 애쓰는 과정을 지켜보도록 한다. 성해나 지음, 창비 펴냄.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가 하루 동안 지구를 돌며 임무를 수행하고, 창밖의 지구 풍경과 각자의 기억을 통해 삶·인류·지구의 의미를 되짚는다. 소설 속 시간은 단 하루에 불과하지만, 주인공들은 열여섯 번의 일출과 열여섯 번의 일몰을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국적과 배경을 지녔지만 우주에서는 동일한 중력 없는 환경을 공유한다. 통상적인 공상과학(SF) 소설과는 달리 긴급 사고나 극적인 사건은 거의 없고 임무는 평온하게 진행된다. 대신 인물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지구를 바라보며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린다. 작가 서맨사 하비는 이 책으로 2019년 이후 처음으로 부커상을 받은 여성 작가가 됐다. '이 시대의 버지니아 울프' '하늘의 멜빌'이라는 찬사도 쏟아졌다. 작가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유럽우주국(ESA) 자료와 우주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행성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한 인물은 지구에 남겨둔 가족을 생각하고, 다른 인물은 어린 시절의 집과 냄새를 떠올린다. 서맨사 하비 지음, 서해문집 펴냄.
단편소설 7편을 엮은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는 공간이라는 테마를 바탕으로 인물들이 누군가의 공간을 방문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놓이며 발생하는 일들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관계의 의미를 되묻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누군가의 경제적·사회적 지표를 가늠하고 한 사람의 내력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가령 '홈 파티'에서 지인의 집들이에 초대된 주인공은 집의 크기, 인테리어, 음식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 간의 계급·소득 등을 은연중에 드러내게 된다. 집들이는 훈훈하게 끝났지만,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주인공은 결국 이날 홈 파티에 함께한 사람들을 다시 찾지 않게 된다. 표제작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안녕이란 모국어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날 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로 살아온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서로의 삶의 기준이 맞부딪치는 일이고, 이를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로 떠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게 우리 삶의 궤적임을 드러낸다. 김애란 지음, 문학동네 펴냄.
'사탄탱고'는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에게 2025 노벨문학상을 안긴 대표작이자 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1985년 발표된 이 소설은 공산주의 체제가 사실상 붕괴 단계에 접어든 시점에서 헝가리의 한 몰락한 집단농장 마을을 다룬다. 실패한 집단농장 주민들이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서 헛된 기대를 품고 악순환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주민들은 이미 농장을 포기했고 남은 것은 술, 불신, 그리고 탈출에 대한 막연한 기대뿐이다. 언젠가 이곳을 떠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각자 농장에 남아 있던 공금을 조금씩 모아두고 있지만 그 희망은 서로에 대한 감시와 의심으로 변질돼 있다. 마을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이어가던 도중 1년 반 전 죽었다고 알려진 마을의 지도자 '이리미아시'와 '패트리너'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퍼진다. 이 소식에 주민들은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술렁이고, 이리미아시와 패트리너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하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믿고 돈을 바친다. 하지만 둘의 계획은 모두를 속이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 마을은 더 큰 혼란과 절망에 빠지고 만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알마 펴냄.
구병모의 장편소설 '절창'은 우리가 타인의 생각을 결국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오독'을 주제로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을 그린다. 책 제목인 절창(切創)은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를 뜻한다. '아가씨'로 불리는 보육원 출신의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이 타인의 절창에 손을 대면 그의 생각을 말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연히 그의 능력을 알게 된 사업가 문오언은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주인공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호의를 보여주는 그에게 미묘한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문오언이 범죄에 그 능력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문오언에 대한 마음을 닫아건다. 이후 문오언은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책을 읽어주는 독서선생을 붙여준다. 아가씨는 자신의 능력으로 독서선생의 내면을 감지하게 되고 그 안에 자리한 연민, 두려움을 보게 된다. 독서선생 역시 그녀의 능력을 점점 더 명확히 인식하면서 연민과 호기심, 그리고 통제 욕망 사이에서 흔들린다. 하지만 아가씨를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도 독서선생은 침묵을 택하면서 둘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오독'인 채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구병모 지음, 문학동네 펴냄.
장편소설 '급류'는 두 젊은 남녀의 험난한 삶과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관계가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얼마나 빠르게 쓸려 내려가는지, 한번 휩쓸리면 얼마나 되돌아가기 어려운지를 급류라는 주제를 통해 암시한다.
지방 소도시 진평에 있는 계곡에 놀러가 만난 도담과 해솔은 우연한 계기로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해솔이 물에 빠질 뻔한 것을 도담이 구하러 뛰어들며 인연이 시작된다. 하지만 해솔의 엄마와 도담의 아빠가 불륜 관계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은 결국 엇갈리고 헤어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우연히 재회하지만 각자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한 채다.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 연인이 되지만 이들의 관계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게 된다. 관계 악화의 이유를 상대방에게서 찾으며 서로를 탓하던 이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명확한 매듭을 짓지 못한다. '급류'는 2022년 출간됐으나 최근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하며 각종 서점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정대건 지음, 민음사 펴냄.
[김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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