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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칼럼] ‘잃어버린 5년’ 예약한 한국 경제

중앙일보 고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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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칼럼] ‘잃어버린 5년’ 예약한 한국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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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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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기획재정부의 대통령 업무보고를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정부는 2026년 경제성장률 목표를 1.8%로 잡고 크게 고무된 듯했다. 새해를 ‘한국 경제 대도약의 원년’이라고 했다. 1.8%는 1%대 저성장 아닌가. 대도약 원년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차라리 솔직한 게 나을 뻔했다. ‘내년에도 1%대 성장이 불가피하니 더 분발하겠다. 정부를 믿고 응원해 달라’고. 경제 규모가 커지고, 저출생·고령화로 인구 구조가 바뀌면서 예전 같은 고성장이 어려워졌다. 그렇더라도 3% 성장은 돼야 일자리가 생기고, 소비와 투자도 안정적으로 이뤄지며 선순환을 탈 수 있다. 1.8%로는 역부족이다.



2027년까지 1%대 저성장 이어져

한 번도 겪지 않은 장기침체 시작돼

환율·집값 오르고 양극화 심해질 것

돈 푸는 단기 대책으로 경제 못 살려


우리는 저성장에 익숙하지 않다. 박정희 정부 이후 1% 이하 성장은 네 차례뿐이었다. 2차 오일쇼크와 신군부 쿠데타로 혼란했던 1980년(-1.5%), 외환위기 때인 1998년(-4.9%),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0.8%), 코로나 팬데믹이 덮친 2020년(-0.7%). 모두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돌발 사건이 있었다. 한국 경제는 그때마다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놀라운 복원력을 보였다. 부진했던 전년과 대비해 이듬해 성장률이 크게 반등하는 게 우리의 성장 공식이었다. 이른바 기저효과다. 실제로 외환위기에서 벗어나면서 1999년 성장률이 11.6%에 달했다. 2021년에는 코로나 충격을 흡수하면서 4.6% 반등했다.

이상 징후가 나타난 건 2023년부터다. 큰 사건이 없었는데도 1.6% 성장에 그쳤다. 당시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돈을 많이 푼 후유증을 앓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다. 하지만 1%대 성장으로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해 미국은 우리보다 높은 2.9% 성장했다. 2024년에 기저효과도 없었다. 2%에 턱걸이했다. 2025년 1%, 2026년 1.8%에 이어 한국은행은 2027년에도 1.9%에 그친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2023~2027년 5년간 1%대 저성장 터널에 갇히는 셈이다. 이러다 위기가 닥치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지만, 위기는 이미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30년’처럼 우리가 한 번도 겪지 않은 ‘잃어버린 5년’을 예약한 셈이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정부 대책은 위기감이 부족하다. 아이디어도 빈곤해 보인다. 지원금과 지역화폐를 앞세워 돈을 푸는 단기 대증요법에 매달린다. 진보 정부의 단골 메뉴다. 국정을 성남시 운영의 확대판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재명 정부가 집권하자마자 한 것도 전 국민 지원금이었다. 경제 연구기관들은 올해 13조원의 민생 쿠폰이 성장률을 0.1%포인트가량 올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효과가 있었지만, 경기 회복의 마중물이 될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게다가 재정에 부담을 주고, 임시방편이다. 새해에도 경기가 안 좋으면 또 추경 얘기가 나올 것이다. 6월에 지방선거가 있으니 민주당이 가만있을 리 없다. 국민 세금을 자기 돈인 양 생색을 내며 풀 게 틀림없다.


돈을 계속 푸니 시중에 유동자금이 넘친다. 유감스럽게도 그 돈이 실물경제로 가지 않고, 증시와 부동산으로 몰린다. 정부는 코스피 5000이 목전에 왔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주가만 오르는 게 아니다. 집값이 치솟고, 물가도 들썩인다. 결국 집 없고, 주식 투자는 엄두도 못 내는 서민과 취약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약자를 위한다는 역대 진보 정부에서 양극화가 심해진 이유다. 환율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해외 투자를 많이 하는 바람에 원화가 약세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지금 와서 서학개미(해외주식 투자자)와 국민연금, 기업을 원망하는 게 맞나 싶다. 원화 약세의 근본 원인은 돈이 많이 풀린 데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시중 유동자금의 물꼬를 실물경제로 돌리는 게 관건이다. 그러려면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를 풀어야 한다. 말만 무성하지 실제 된 게 별로 없다. 스타트업 종사자는 일이 생겼을 때 밤이라도 새우겠다는 열정을 갖고 있다. 가장 원하는 게 주 52시간 근무제 완화다. 정부가 이거 하나 해결해 주지 않으면서 AI 딥테크 스타트업을 1만 개 육성하겠다고 하니 공허하게 들린다. 지난 4년간 기술 스타트업은 외려 1만4000개나 감소했다. AI(인공지능)시대를 맞아 정부 부처는 온갖 정책과 조직 이름에 경쟁적으로 AI를 갖다 붙이고 있다. 하지만 원전을 줄이면서 무슨 수로 AI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건지 명확지 않다. 실용을 외치다 정치와 경제가 뒤죽박죽 섞이면서 길을 잃은 것이다.

정부의 경제 성과로는 주가 상승과 미국 관세 협상 타결이 꼽힌다. 실물경제가 받쳐주지 않으면 늘 불안한 게 주가다. 미국 관세 협상도 대성공인 것처럼 무용담이 쏟아졌지만 정말 그런가. 엄밀히 말하면 매년 200억 달러 넘는 돈을 미국으로 보내야 하는 큰 부담이 남았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고 실력이다. 장기 침체가 시작됐는데, 뭐가 그리 자신만만한 건지 모르겠다.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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