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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타조와 양자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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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타조와 양자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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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식 수필가

곽정식 수필가

요즘 양자역학 공부 붐이 일고 있다. 양자역학에 나오는 ‘얽힘’이나 ‘중첩’ 같은 기본개념이라도 깨우치려 관련 영상도 여러 번 시청했지만 알 듯 말 듯 했다. 일전에 양자역학을 불교 용어로 설명했던 친구가 생각나 오랜만에 전화했다. 친구는 통화 후 “오래전 이야기인데 한번 봐!”라는 글과 함께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동영상 속엔 20년 넘게 함께 지낸 스님과 타조가 등장한다.



타조가 겁 많다고 여기는 것은

동물 얕보는 인간중심적 사고

양자학의 세상에선 만물 동등


김해의 한 절에서 타조 여섯 마리를 키우던 중 갑자기 물난리가 났다. 아프리카 건조 지역 출신인 타조 다섯 마리가 휩쓸려서 갔고 새끼 타조 한 마리만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스님은 살려낸 타조에게 ‘달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조석으로 보살폈다. 달마는 스님이 어디를 가도 따라 다녔다. 먹이도 스님이 주는 것만 먹었다. 사람들은 그런 달마를 ‘껌딱지’라고 불렀다.


스님이 계단 위 대웅전에 올라갈 때면 달마는 따라가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스님이 내려오기만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절에서 오래 머문 달마의 불심이 깊어져 스님이 예불할 때는 방해하지 않고 바라만 본다고 했다. 사실, 달마가 스님을 따라가지 않은 것은 계단을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조는 발뒤꿈치가 없고 발가락이 두 개뿐이라 오르막이나 내리막에서는 걷지 못한다.

영상을 본 후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타조는 어떻게 ‘타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타조(駝鳥)가 한자어임을 감안하여 중국 문화와 역사에 식견이 넓은 김수정 박사에게 물었다. 예상대로 김 박사는 타조의 작명 유래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사람들은 낯선 곳을 다녀오면 ‘거기 갔더니 뭐가 살더라’라는 말을 하지요. 인도엔 공작, 아메리카엔 칠면조가 있고, 아프리카에는 타조가 산다고 하는 것처럼요. 중국인들은 15세기 처음 아프리카에 갔을 때 서역 지방의 낙타(駱駝)와 생김새가 흡사한 새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새는 낙타의 긴 목, 둥근 몸통, 긴 다리를 그대로 닮았던 거지요. 게다가 낙타의 발가락이 두 개인데 그 새의 발가락도 두 개였습니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낙타조(駱駝鳥)’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시간이 흐르면 긴 이름은 짧아지기 마련이지요. 결국 낙타조는 타조가 되었답니다.”


김 박사의 설명을 듣고 타조의 학명을 찾아보았다. 타조의 학명인 ‘Struthio Camelus’에도 낙타를 의미하는 ‘Camel’이 들어 있었다.

김 박사로부터 타조의 작명 유래를 듣고 나니 수년 전 뉴질랜드인 캠벌이 알려준 ‘타조 효과’란 말이 떠올랐다. 그는 키위 외에도 에뮤·펭귄·타조와 같이 날지 못하는 주금류(走禽類)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한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타조 효과란 위험에 처한 타조가 머리를 모래에 묻고 주변 상황은 외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투자 분야에 쓰이는 말인데, 부정적인 정보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마치 그 정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캠벌에게 타조가 머리를 모래에 박는 이유를 농담조로 물었다. “50년이나 사는 타조가 세상이 싫증 난 게 아니라면 주변 포식자들이 무서워 겁을 먹고 ‘에라 모르겠다’며 머리를 박는 게 아닙니까?”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타조 효과’란 말은 지극히 인간 중심사고에서 나온 말이지요. 사실 타조에게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신체적 특징이 있습니다. 타조에게는 다른 새들에게 다 있는 모이주머니가 없어요. 한마디로 소화시스템에 결함이 있는 거지요. 모이주머니가 없는 타조는 수시로 굵은 모래나 작은 자갈을 섭취해둬야 먹이를 소화시킬 수 있어요. 타조인들 모래 씹는 게 뭐가 좋겠습니까?”

인간은 동물을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로 나누고 척추동물을 다시 포유류·조류·어류·양서류·파충류로 구분하여 진화의 수준을 논했다. 어쩌면 이런 학리적 구분이 타조와 인간의 조합을 신기하게 보도록 했을지 모른다.

타조 달마의 이야기를 보내준 친구는 양자역학의 중첩과 얽힘도 불교철학으로 설명했다. 세상이 이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어리석게도 우리가 갈라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엔 전쟁과 평화가 중첩하고 있다. 우리가 전쟁을 선택하는 순간 평화는 무너지고 만다. 알고 보면 평화를 실현하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이스라엘의 정의와 팔레스타인의 정의가 다를지 몰라도 그들의 평화는 하나일 뿐이다.

불교철학으로 양자역학을 해석하니 일찍이 공자가 가르쳐준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친구가 양자역학을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이나 장자의 ‘상대주의(相對主義)’로까지 비유하면 모르는 것은 더 커져만 간다.

곽정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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