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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그만하지 않기 위해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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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그만하지 않기 위해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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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한 스토리라인에 깊은 사색을 읽을 수 없는 소설을 독자들은 ‘양산형’이라며 비판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 역시 독자를 사유로 이끄는, 생각을 깨우는 소설이다. 선인도 악의를 가질 수 있고 악인도 선의를 베풀 수 있듯 보통 사람은 양가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소설일수록 사건을 겪는 인물을 다각도에서 보게 한다. 인물의 행위에 대한 동기와 과정마다 독자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사유하게 만들어야 입체감이 살아난다.

소설 속에서 피해자가 있는 사건을 만들 때, 나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목격자도, 방관자도, 가해자도 되어보려 한다. 사건이 복잡할수록 피해자와 가해자를 딱 꼬집어 짚어내기 어렵다. 단선적으로 사건을 설계하면 구상하기는 쉽지만, 그만큼 이야기가 납작해진다. 보는 자리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듯, 어떤 사건도 평면적이지는 않다.

예술은 사회가 기억해야만 하는 사건을 이야기로 복원한다. 카멜 다우드가 쓴 장편소설 <후리>는 알제리 정부가 언급을 금지한, ‘검은 10년’이라 불리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일을 다룬다. 주인공 오브는 1999년 알제리 북서부 하드 셰칼라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유일한 생존자로, 내전의 상흔으로 목소리를 잃고 침묵 속에 살아온 인물이다. 이 소설은 국가가 망각시키려 한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 연극 <하나코>, 소설 <간단후쿠>처럼 우리 안에서도 수없이 많은 방향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내러티브가 가진 힘이 여기에 있다. 같은 사건을 겪었더라도 시선이 다른 인물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심지어 같은 인물을 앞세워도 작가의 시선에 따라 사건이 전혀 다르게 그려지기도 한다. 독자도 자신의 시선에 따라 스토리를 새로이 해석하며 사유한다.

가공한 사건이 이러한데,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얼마나 더 입체적일까.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는 발생한 사건들을 제대로 톺아보기를 꺼리고 귀찮아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인물을 사건의 가해자로 끄집어내어 낙인찍고 응징하고,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피해자에게 돈을 주어 마무리하기 바쁘다. 그 후에는 사건이 재조명될 때마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앞뒤 없이 따라붙는다. 세월호 참사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남은 재판이 있고 새로운 이야기들도 나오고 있다. 남은 사람에게는 현재진행형이다.

무안공항에서 있었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1년이 되었다. 사고의 진상과 책임 규명은 사실상 표류 중이고, 제대로 된 정보 공개조차 없다. 국내 여러 공항에서 유사한 콘크리트 둔덕이 확인되었으나, 활주로 주변 환경의 가시적인 개선은 더딘 상황이다. 사고 당시에도, 지금도 공항 안전을 총괄하는 한국공항공사 사장은 공석이다. 무안공항에는 아직 유가족들이 지내고 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시간이 이만큼 흘러 이제야 무언가 해보려 한다는 말을 가슴 아프게 들었다. 한 유가족은 ‘그만하지 않기 위해 이야기한다’고 고백했다. 다시 강조하건대 사건에는 인과가 있고 입체적이어서 누군가가 어느 순간에 종결됐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니 계속 이야기하자.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더 이상 비극적인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 그제야 비로소, 알고 있거나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사람들이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새해에도 우리는 이런저런 일을 겪을 터다. 다만 나는 바란다. 더 많은 사람의 각도에서 사건을 펼쳐 보길, 사회가 다양한 시각을 보듬을 수 있길, 오래 걸리더라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길.

최유안 소설가

최유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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