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전선을 교착상태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의 다층 방어시설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대전차 방벽도 그중 하나다. 드론과 정밀유도 무기가 전장을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콘크리트와 흙으로 만든 방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공세와 방어를 가르는 핵심 요소가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2023년 러시아군이 전선에 설치한 ‘용의 이빨’(용치)이 이를 증명했다. 용의 이빨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사각뿔 모양의 대전차 장애물이다.
방벽 등 장애물은 단독으로 싸우진 않지만, 다른 전력과 결합하며 방어 효과를 증폭시킨다. 방벽에 의해 기갑부대가 멈추거나 우회하면, 드론이 표적 식별과 타격 유도를 쉽게 수행할 수 있다. 즉 방벽은 감시·타격 체계를 위한 ‘무대’를 제공하는 셈이다. 서방의 전차와 중화기 지원까지 받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 이유다. 물론 한계도 있다. 충분한 화력과 감시체계가 결합되지 않거나 방벽이 지나치게 고정적일 경우 예외 없이 돌파된다.
“북한은 혹시 남쪽이 북침하지 않을까 걱정해서 3중 철책치고, 혹시 탱크라도 넘어오지 않을까 해서 평원 지역엔 방벽을 쌓고, 다리를 끊고, 도로를 끊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9일 통일부·외교부 업무 보고에 앞서 한 말이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 4월부터 비무장지대(DMZ) 북쪽 지역에서 대전차 장애물로 추정되는 방벽과 철조망을 설치하고 지뢰 매설에 나섰다. 군은 “전에 없던 움직임”이라고 했다.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북한이 한국의 북침을 대비해 대전차 방벽을 쌓는다는 얘기는 생소하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 9월 대통령 지시(강원도 타운홀 미팅) 이후 지역 교통 및 미관을 저해하는 접경지역 대전차 방벽 등 군사 장애물을 처리 중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국방부 주관으로 전수조사에 나선다고도 한다. 남북의 엇갈린 풍경이다. 남북관계 개선 기대감에 대전차 방벽의 군사적 효용성을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 흉물처럼 보이는 방벽을 현대화된 차단시설 등으로 대체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다층 방어선은 적의 진격을 늦추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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