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주 사회부 기자 |
어릴 때 예술가를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구나 K팝 아이돌이나 미쉐린 셰프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상하고 표현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앞둔 때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 명의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세상에 대한 감흥이 떨어지고 염세적으로 변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내일도 오늘처럼 팍팍한 하루고, 내년이라고 더 나아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언젠가 비범한 일을 저질러버릴지 모른다고 착각하던 시절은 점점 지나고, 하루하루 생활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물살을 헤치고 가듯 무거운 일이다.
올해 일본에서 흥행 기록을 대거 갈아치운 영화 '국보'는 삶을 넘어서는 비범한 예술에 대한 필사적인 집착을 보여준다. 1964년 세력 다툼 속에서 야쿠자 보스 아버지를 잃은 키쿠오는 당대의 가부키 간판배우 하나이 한지로의 집으로 들어가 최고의 배우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집에서 키쿠오는 가부키 명문가 후계자의 지위를 타고난 슌스케와 친구이자 라이벌로 함께 성장한다.
대를 이어 세습하는 가부키 업계에서 재능은 있지만 '핏줄'이 없는 키쿠오와 배경을 타고났지만 재능은 못 미치는 슌스케는 서로를 질투하고 쫓아가는 파괴적인 관계를 이어간다. 주인공 키쿠오는 평범한 가정도 유지하지 못하고 모든 일상이 부서지는 고난을 겪는다. 닿을 수 있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한 '가부키 국보' 자리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영화는 무대에서의 짧은 예술을 위해 모든 삶을 내던지는 인물을 보여준다. 하얗게 얼굴을 칠한 예술의 세계 뒤편에는 조커처럼 얼룩진 역경이 있다. 누군가는 '역시 미쳐야 최고가 된다'는 식의 자기계발식 성공 신화로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동아시아 특유의 압축적인 전후 현대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비범한 목표와 역사적 과업도 매일 누적되는 일상 앞에서는 덧없다고 느꼈다.
시대를 이끄는 혁신적 사업이나 찬란한 예술은 우리의 일상에 비하면 너무 작은 부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밝은 조명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가족도 내던지고 일상의 행복을 포기하면서 국보의 자리에 오른 삶이 특별하다면 그 비범함은 국보의 자리가 아니라 고행길을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이어간 하루하루의 누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새해에 저마다의 목표를 세운다. 운동이나 금연, 금주 같은 당연한 것부터 자기계발이나 결혼, 내 집 마련까지 다양하다. 삶의 계획을 세우고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삶일 수밖에 없다. 어떤 특별한 위치도 지나가는 하루보다 무거울 수는 없다.
모두가 특별해지고 싶어한다. 소셜미디어가 현실보다 중요해진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돈을 더 벌고, 더 좋은 글을 일필휘지로 쓰는 삶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는 모두가 저마다의 방에서 그리고 쓰고 고치는 일을 반복하면서 좀 더 행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모두가 저마다의 국보가 될 수 있다. 새해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국보가 되기를 기원한다.
[박홍주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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