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12에서 무너져 1로 또 떨어지고, 이제 달력도 12에서 다시 1로 넘어간다. 작아지고서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한 달의 덧셈은 그리 큰 숫자는 아니었다. 한 해에 그래도 등대처럼 31일의 하루가 더 있어 얼마나 좋은가. 홀수의 그날은 많은 힘을 지니고 있다.
세상일 뜻대로 안 되는 줄이야 진즉에 알았지만 올해도 어김이 없다. 수월하고 탁월하고자 하는 이 어디 혼자뿐이랴. 을사년 초에 세웠던 꿈들 점점 작아지고 작아져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마지막이라고 끝은 아니다. 옛날 영화마다 마지막에 가면 점 하나 점점 커지다가 끝이라는 글자로 변신하여 화면이 끝난다. 그때 그 ‘끝’이라는 글자는 어쩌면 그리도 해골의 앙다문 이빨 같던가. 웃음과 울음이 지나간 얼굴 한번 쓰다듬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흐트러진 골격을 다시 짜맞추고 일상을 시작하였다.
시작은 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심보르스카의 시집 제목은 시작과 끝,이 아니라 끝과 시작,이 아닐까. 가지에 붙어 나무의 높이에 의탁하였던 잎들도 낙엽이 되어 지구가 되었다. 지구는 앉은키가 따로 없다. 그 어디로 넘어가기야 하겠지만 넘어질 일이 없다. 높은 곳에 달려 있을 땐 최대한 잎을 펼쳤으나 이제 낙엽이 되어 최소한을 향하며 뒹군다.
작아지는 것들. 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면 우리는 이제 끝이라는 걸 안다. 슬슬 어깨를 움츠리고, 옷깃을 여민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들과도 어울려 살아가는 곳, 사실 여기에서는 작아지는 게 원리다. 저 거대한 태양도 쟁반만 하고 저 달도 알밤만 하고서야 지구로 온다. 햇빛 가루, 달빛 가루. 그렇게 작아지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올 수 없다. 내가 딛고 사는 이 지구도 어마어마한 크기지만 부피를 버리고 납작해지고서야 육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들의 운행 질서를 설명하는 자연법칙은 작은 방정식에 담긴다.
용수철 같은 나날들. 하루는 인류가 함께 입는 옷이다. 그 작은 하루에 일생이 나누어 담기듯 작아지지 않고서는 지루한 몸도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 말라비틀어졌다가 먼지가 되기 위해 먼저 떠나는 낙엽을 뒤따라야 한다. 열매, 그 작은 성공을 공평하게 단출하게 달고 있다가 훌훌 털어버린 자세를 겨울나무에서 배운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