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연말엔 나를 읽어봐요

진지한 관찰, 총체적 동원, 부단한 질문
'현존 최고' 비평가가 말하는 문학 특질
한 해 돌아보는 성찰 도구로 유용할 듯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중년 청소부 히라야마는 독서로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마무리한다. 티캐스트 제공

뒤늦게 본 빔 벤더스 감독 영화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고지)를 따라, 요 며칠 잠자리에서 책을 읽었다. 과거의 삶을 등지고 도쿄 시부야 공중화장실 청소부로 살아가는 히라야마는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성실히 치른 뒤 이부자리에 누워 잠들 때까지 문고본을 읽는다. 윌리엄 포크너 소설 '야생 종려나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단편집 '11', 고다 아야 수필집 '나무', 고단했던 그의 하루를 완벽하게 매조지는 건 문학 작품들이다.

기자가 취침등에 비춘 책도 한 손으로 펼칠 수 있는 얇은 페이퍼백이었다. 영국 문학평론가 제임스 우드가 쓴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노지양 옮김·아를 발행). 네 번의 강연 원고를 네 장(章)의 에세이로 바꿔 쓴 책이다. 다름 아닌 신형철 평론가가 현존 최고 비평가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며 출간을 권하고 자진해서 해제를 썼다니 안 읽을 도리가 없다.

우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요컨대 문학(소설)이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서 삶을 확장시키는 특질을 지녔다는 것인데, 연말이라는 독서 시점과 맞물리니 한 해를 되돌아보는 특별한 지침으로도 읽힌다.

'진지한 관찰'이라는 제목의 장은 안톤 체호프 단편 '입맞춤'으로 운을 뗀다. 숫기 없는 장교가 무대회에 초대받아 겉돌다가 난생 처음 여인의 키스를 받는다. 엉뚱한 남자에게 실수한 것이었지만, 당사자는 며칠을 맘이 부풀다 못해 동료들에게 조심스레 털어놓는다.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았던" 이야기는 그러나 정확히 1분 만에 끝나고 시큰둥한 반응만 남긴다.

그다음 장인 '모든 것을 사용하기'는 토머스 드 퀸시 에세이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인용한다. 자전적 소설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1821)으로 유명한 드 퀸시가 이 글에서 파고드는 주제는, 맥베스가 왕을 살해한 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왜 그토록 놀랐는가다. 때마침 셰익스피어 희곡이 현실이 된 듯, 당대 영국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범이 범행 직후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노라 진술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드 퀸시의 집요한 탐구는 해답을 구했다. 맥베스도 살인범도 노크 소리에서 "삶의 맥박이 다시 뛰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 잔인무도한 범죄에 순간 멈춰섰던 일상이 다시 시작됐음을 깨닫고 소스라쳤다는 것.

책 맨 앞장 '왜라는 질문'은 어떤가. 맹신에 가까운 종교적 집안에서 일찌감치 문학을 정신적 탈출구로 삼은 저자에게 소설은 '왜라는 거대한 질문이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정원'이다.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며 생각마저 단속하는 예수의 이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공감과 연민이 소설을 닮았다는 것.

우드는 이렇게 올 한 해를 성찰할 도구를 우리에게 쥐여준다. 주목받길 원하는 삶의 조각을 진지한 관찰력으로 조합해 풍성하게 표현하기. 삶을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대신 총체적 경험을 동원해 뚫고 나가기. 기탄없는 질문으로 '꼭 그렇지는 않은' 삶의 가능성을 향유하기(토마스 만은 허구란 언제나 '꼭 그렇지는 않은'의 문제라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처음 영화를 봤을 땐 느닷없다 싶어 잘 이해되지 않았던 히라야마의 눈물과 분노도 공감할 수 있을 거 같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