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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원 공포, 유학 간 딸 전화가 두렵다

중앙일보 장원석.김경희.장서윤.남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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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원 공포, 유학 간 딸 전화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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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 美제련소 유상증자 가처분 기각
아침을 보통 커피와 바나나로 해결하는 직장인 정모씨는 예전보다 식사값이 부담스럽다. 출근길에 들르는 커피집에서 최근 아메리카노 가격을 2000원에서 2500원으로 올렸다. 동네 수퍼마켓에서 파는 바나나 한 송이 값도 예전엔 3000원 안팎이었는데 요즘 5000원을 넘는다. 국제유가가 내렸다는데 휘발유값은 여전히 L당 1730~1740원대다. 일할 때 쓰는 인공지능 플랫폼 구독 서비스 결제 금액도 마찬가지다. 그는 “매달 20달러가 자동으로 결제되는데, 3만원 가까운 금액이 찍혀 있더라”며 “올해 초·중반만 해도 2만원대 중반이었는데, 환율 때문에 원화 환산 금액이 뛴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의 불만엔 이유가 있다.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 대비 원화값은 전 거래일(1480.1원)보다 3.5원 하락(환율은 상승)한 1483.6원에 거래를 마쳤다. 전날 1차 저항선으로 꼽았던 1480대를 뚫은 뒤 연이틀 하락했다. 연고점인 6월 30일(1350원)과 비교하면 6개월 새 10%가량 원화가치가 내렸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원화가치 하락은 외국산 과일 등 수입물가 상승을 부추긴다. 바나나 소매가격은 1년 전과 비교해 15.8%(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상승했고, 파인애플도 20%가량 올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1월 수입물가지수는 한 달 전보다 2.6% 상승해 1년7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커피 수입물가지수는 불과 넉 달 사이 28.8%(원화 기준)나 뛰었다. 커피콩 시세 급등과 가파른 원화가치 하락이 맞물린 결과다.

기름값도 비슷하다. 두바이유는 22일 기준 연초 대비 18.6% 가격이 내렸지만,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판매가격은 L당 1736.48원으로 연초(1672.68원)보다 3.8% 상승했다. 환율 탓에 정작 국민은 유가 하락에 따른 물가 안정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에 다니는 강모씨는 “한국의 한 재단에서 원화로 장학금을 받아 여기서 달러로 환전한다. 이달에는 지난여름보다 100달러 정도가 줄었다”면서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고 있고, 한국에서 안 쓰던 가계부까지 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을 둔 윤모씨는 “딸이 송금해 달라고 전화가 오는 게 두려울 정도”라며 “1년에 두 번씩 미국에 들르자고 아내와 얘기했는데 현실적으로 한 번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발 늦는 정부전문가 “국내 투자 매력도 높여야”



22일 서울 남대문시장 상인 안모(73)씨가 수입 치즈·빵 등을 정리하고 있다. 남수현 기자

22일 서울 남대문시장 상인 안모(73)씨가 수입 치즈·빵 등을 정리하고 있다. 남수현 기자


지난 22일 찾은 남대문시장 수입상가에선 상인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수입 치즈와 육가공품을 판매하는 안모씨는 “1년 반 전 1만8000원에 팔았던 치즈를 지금은 3만원에 판다”며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은 아무래도 가성비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부담이 너무 크다”고 불평했다.

역대급 ‘원저(低)’ 장기화 조짐에 외환당국도 분주하다. 한 달 새 ▶‘국민연금 수익·외환 안정 뉴프레임워크’ 가동 ▶기재부 외환수급 태스크포스(TF) 설치 ▶‘외환 건전성 제도 탄력적 조정 방안’ 발표 등 잇따라 대책을 내놓았다. 국민의 노후 자산에 손댄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국민연금까지 동원했지만, 시장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당국의 입김이 안 먹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한 외환시장 전문가는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달러 유동성이 부족해 원화가치가 하락하는 상황이 아니다”며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서 연금·보험 등 장기저축이 증가했고, 해외로 대규모 자금이 이동한 게 근본적 요인”이라고 짚었다. 그는 이어 “국내 투자 매력도를 높여 외환에 대한 수요-공급 곡선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확한 상황 진단과 대처도 늦었다. 외환시장이 안정적일 땐 1조 달러를 돌파한 순대외자산이 ‘외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던 정부였다.

이제는 반대로 국책연구기관·한국은행에서 해외 투자 쏠림을 완화해 순대외자산 증가세 둔화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최근에는 수출 대기업과 금융회사를 소집해 달러의 원화 환전을 압박하는 등 관치(官治) 논란도 키우고 있다. 증권사들은 ‘해외주식 투자’ 관련 서비스를 줄줄이 중단했다. 이른바 서학개미(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자)의 해외 투자를 부추기지 말라는 금융당국의 압박 때문이다.


키움증권은 23일 ‘키움증권 미국주식 톡톡’ 서비스를 26일부터 중단한다고 밝혔다. 유진투자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은 ‘해외주식 입고 이벤트’를 종료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당국이 현장 검사까지 나서는 상황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며 “이벤트를 안 한다고 투자를 안 하는 건 아닌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주식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사용 기간이 남아 있던 이벤트 쿠폰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불만 글이 계속 올라왔다. 해외주식 투자자 이모(30)씨는 “원화값 하락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 같다”며 “혜택을 줄인다고 해서 국장(국내 증시)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원석·김경희·장서윤·남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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