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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합사 철폐” 日 강제징용 유족, 야스쿠니 신사 상대 국내 첫 소송

조선일보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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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합사 철폐” 日 강제징용 유족, 야스쿠니 신사 상대 국내 첫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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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히데키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사무국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서 열린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제소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노 히데키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사무국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서 열린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제소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과 무단 합사(合祀)된 한국인 군인·군속 유족들이 일본 정부와 신사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다. 유족들은 25년간 일본에서 여러 차례 ‘합사를 철폐하라’고 다퉈왔으나 일본 법원이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자 한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민족문제연구소·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송 대리인단은 23일 서울중앙지법에 일제에 강제 동원돼 희생된 10명의 군인·군속 유족을 대리해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무단 합사 철폐 소송을 냈다. 유족들은 야스쿠니 신사가 관리하는 사망자 명부에서 희생자 이름을 삭제하고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가 8억80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벌어진 내전과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숨진 246만6000여 명을 추모하는 곳이다. 이 중 약 213만위가 태평양전쟁과 관련됐고,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도 합사돼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집돼 전선에서 사망한 조선인 희생자도 합사됐다. 대리인단은 “야스쿠니 신사는 희생자들을 무단 합사하고 오늘날까지 이를 유지하고 있다”며 “유족 의사에 반하는 특정 종교·이념 체계의 추모 구조에 희생자를 편입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계속적 인격권 침해”라고 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전쟁으로 죽음에 내몰린 뒤에도 일본의 ‘천황을 위한 전몰자’ 서사에 동원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대리인단은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피해자였다는 역사적 진실 위에 유족이 원하는 방식으로 온전히 추모할 권리를 회복하고자 한다”고 했다.

유족들은 2001년부터 일본 사법부에 합사 철폐와 일본 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이어왔다. 그러나 세 차례 소송에서 모두 패소하자 국내 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대리인단은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한 국내 소송에서 승소한 것도 주요한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한 국가 법원이 다른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대해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 ‘국가 면제’ 원칙을 이유로 소송 제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2023년 서울고법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항소심에서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일본이 한국 영토 안에서 한국민에게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 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국제 관습법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상고하지 않으면서 이 판결은 확정됐다.

원고 대표인 유족 이희자(82)씨는 이날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 가 죽게 만들어 놓고 일본을 위해 돌아가셨다며 야스쿠니에 합사시켰다니 모욕감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이씨 아버지는 1944년 일제에 군속으로 강제 동원된 뒤 이듬해 중국 광시성에서 사망해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 합사됐다.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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