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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오염된 4·3에 노병이 밝힌 ‘진실’

조선일보 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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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오염된 4·3에 노병이 밝힌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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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새벽 6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1947년 ‘제주 4·3 사건’ 당시 수습 임무를 맡은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9연대에서 복무한 노병(老兵) 한 분이 아직 살아 계신다는 제보였다. 제보자는 노병의 주소가 제주도라는 사실만 전했다. 그 뒤 연락처를 어렵게 구했고 휴대전화 너머에서 95세 노병이 절박하게 말했다.

“내가 역사를 바로 쓰라고 4·3 유족회에 네 번이나 말했는데 아직까지 답이 없어요. 기자님, 제주도는 못 오십니까?” 4·3 사건 당시 18세 병장으로, 9연대 복무 장병 550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성택 예비역 육군 소령이었다.

그날 오후 제주시 산록북로 부근 카페에서 한 소령을 만났다. 9연대장이던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가 있는 곳이다. 고령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노트북 화면에 질문을 확대해 보여주는 힘겨운 인터뷰 속에서도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한 소령은 “산 증인으로서 사실 그대로 역사를 전하는 게 내 마지막 책무”라며 “박 대령은 ‘폭동 진압을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박 대령은 공비들이 산으로 끌고 가 총칼로 위협하던 주민들을 피신시켰다”며 “정부가 부르면 언제든 증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박 대령 암살범이 과거 법정에서 주장한 ‘30만 희생설’을 토대로 최근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 검토를 지시했다. 좌파 진영은 일사불란했다. 지시 당일인 15일 민주당은 “국가유공자 지정과 무공수훈 제도 전반에 대한 점검과 보완이 필요하다”고 즉각 성명을 냈다. 16일엔 문대림 민주당 의원이 ‘4·3 진압 공로 서훈 취소’ 조항을 담은 4·3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17일 좌파 시민단체는 박 대령의 고향인 경남 남해군에 세워진 그의 동상 앞에서 국가유공자 지정 철회와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집회를 벌였다. 이에 19일 권오을 보훈부 장관마저 업무 보고에서 “결자해지로 책임지고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했다.

반면 박 대령이 무장 폭동을 일으킨 남로당 세력과 주민들을 떼어놓기 위해 수행한 선무(宣撫) 작전을 조명하거나, 당시 임무를 수행한 군인에 대한 예우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우파 진영은 역사를 바로 살피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노병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기자 앞에 나선 이유다.

한 소령은 “이제 9연대 장병은 모두 죽고 나만 남았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내 책무”라고 다시 말했다. 노병은 박 대령 추도비 앞에 꼿꼿이 몸을 펴고 마지막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의 증언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재단되는 역사 속에서 과연 ‘있는 그대로의 역사’와 마주할 용기가 있는지 우리에게 준엄하게 묻고 있다.

[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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