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암 이관술 선생 |
해방 후 미 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주범으로 몰려 처형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고 이관술 선생이 재심에서 7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이현복)는 22일 이 선생의 통화위조 등 혐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현재 헌법과 형사소송법상 근본이자 핵심인 인신구속에 관한 법리와 증거법칙을 이 사건에 적용하면 재심 대상 판결의 피고인에 대한 유죄 증거 중 주요한 것은 증거능력이 없고, 나머지는 증거가치가 희박하다”며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거가치가 없는 것으로 유죄를 고시한 판결의 존재 및 기재 내용만으로는 피고인에 대해 유죄라고 볼 수 없어 무죄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선생에게 유죄가 선고될 당시는 헌법 제정 전이었고 인신구속 규정도 구체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았지만, “유죄 증거는 의회주의에 입각한 법령에 의한 적법절차에 따른 것이어야만 한다는 일반적 법질서가 기본적으로 형성된 상태였다고 판단된다”면서 “현행 형사소송법을 기초로 형성된 인신구속이나 증거법칙 관련 법리는 이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유죄 증거로 사용된 공동 피고인들의 자백 진술에 대해 “사법경찰관들이 자행한 불법구금 등 직권남용 범행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며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함이 명백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선고에 앞서 “이 판결이 이관술 선생과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선생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핵심 간부들은 1945년 10월부터 서울 소공동 근택빌딩에 있는 조선정판사에서 인쇄 시설을 이용해 6차례에 걸쳐 200만원씩 총 1200만원의 위조지폐를 발행한 혐의를 받았다. 조선정판사는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으로, 광복 후 조선공산당이 이 곳을 접수한 뒤 조선정판사로 이름을 바꾸고 공산당 본부로 활용했다.
이 선생은 1946년 7월 이 사건 주모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다른 간부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진 이 선생은 1946년 11월 미군정기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대전 골령골에서 처형됐다.
이 선생의 외손녀인 손옥희씨는 2023년 7월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2년3개월 만인 지난 10월 재심 재시를 결정했다. 검찰은 지난 15일 결심공판에서 “판결문과 현존하는 일부 재판기록, 당시 언론 기사와 연구 서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엄격한 증거 법칙에 따랐다”며 무죄를 구형했다.
이날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자 법정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판결 후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는 “해방 직후 국가 권력이 정치적 목적 아래 행정, 군대, 경찰, 사법기구를 총동원해 허구의 범죄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역사적 과오를 79년 만에 대한민국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끼운 역사적 판결”이라며 “법과 양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결단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고 밝혔다.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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