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90회>]
유명환 전 장관, 회고록서 ‘여수 엑스포’ 성공 비화 밝혀
홍보물에 독도 표기됐다며 日 반대에 정계 실세 니카이 설득
니카이, 야치 차관에 전화 “도대체 말이 되느냐” 질책
집무실 앞에 엑스포 입간판 세워...“한국에 진짜 애정 많아”
유명환 전 장관, 회고록서 ‘여수 엑스포’ 성공 비화 밝혀
홍보물에 독도 표기됐다며 日 반대에 정계 실세 니카이 설득
니카이, 야치 차관에 전화 “도대체 말이 되느냐” 질책
집무실 앞에 엑스포 입간판 세워...“한국에 진짜 애정 많아”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이 2017년 6월 전남 목포 공생원을 찾아 원생을 만나고 있다. 공생원은 일본 출신의 윤학자 여사가 한국 고아들을 돌봐왔던 곳이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지난해 은퇴한 니카이 전 의원이 2007년 일본이 여수 엑스포를 지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회고한 책이 최근 출간됐습니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의 ‘오럴 히스토리 총서’ 시리즈로 기획됐습니다.
국립외교원 조양현 교수가 2023년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유 전 장관을 만나 그의 외교 현장 경험과 판단, 정책적 결정을 505쪽에 담았습니다.
유 전 장관이 퇴직 후 한미동맹재단 이사장, 한일포럼 한국 측 회장을 동시에 맡아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보기 드물게 미국과 일본 두 나라와 관련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는 1973년 제7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주일본·주필리핀·주이스라엘 대사, 외교부 1·2차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임명돼 2010년까지 재직하며 한미 관계, 남북 관계, 한일 관계의 주요 국면마다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07년 주일대사로 부임
그의 회고록에는 외교 현장의 이면과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가 다수 담겼는데, 그 중에서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벌어진 물밑 외교입니다.
유 전 장관은 2007년 자신이 주일대사로 부임하게 된 경위부터 설명합니다. “2006년 12월 개각 당시 외교부 1차관으로 재직 중이었고, 반기문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면서 장관 승계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송민순 청와대 안보실장(외시 9회)이 외교부 장관으로 지명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송 실장은 아주 유능한 분이지만, 외교부 기수라든가, 내가 미주국장할 때 그가 심의관으로 일한 관계여서 (지명된) 그날로 사표를 냈다”고 했습니다.
이후 라종일 주일대사의 후임으로 임명돼 2007년 3월 하순 도쿄에 부임했습니다. 당시 그가 직면한 최대 현안은 2012년 여수 엑스포 유치였습니다. 여수와 모로코 탕헤르가 경쟁하고 있었는데 일본 정부는 모로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유 대사는 “인접국이자 중요한 우방인 일본이 한국의 엑스포 유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사로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일본 외무성의 야치 쇼타로 차관을 만나 설득했습니다. “이것은 한일 관계에서 영원히 하나의 오점으로 남을 일”이라며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변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외무성 내부 보고에 따르면,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회 홍보물에 독도가 표시돼 있어 일본 정부로서는 지지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사에 겐이치로 당시 아시아대양주국장이 “국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는 겁니다.
유 대사는 대사관으로 돌아오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회가 홍보물에 독도를 표기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일본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일본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겠는가.” 의문이 들어 대사관에 복귀하자마자 해양수산부 파견 주재관에게 엑스포 홍보물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니, 문제의 지도는 한국에서 통상 사용되는 지도에 여수 지역을 강조한 수준이었습니다. 독도를 크게 그린다든가, 표기를 강조한 것은 없었습니다.
유 대사는 곧바로 야치 차관에게 전화를 건 후, 다시 외무성을 찾았습니다. 그는 홍보용 지도를 내밀며 “여기서 독도를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치 차관이 독도 표기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유 대사는 “한반도 지도에 독도가 표시된 것이지, 일부러 크게 그려 강조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2023년 9월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제 31차 한일포럼 기자회견에서 유명환 한국측 의장(왼쪽. 전 외교부 장관)과 오코노기 마사오 일본측 의장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뉴스1 |
야치 차관 “자민당 먼저 설득해 오라”
그럼에도 외무성의 공식 입장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유 대사는 2006년 일본의 독도 주변 해양 탐사 문제로 담판을 벌이면서 관계를 튼 야치 차관에게 어떻게 해야 외무성이 입장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야치 차관이 “자민당 간사장, 총무회장 등 지도부를 찾아가 설득해서 자민당에서도 동의하면 입장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귀띔했습니다.
그래서 유 대사가 가장 먼저 찾아간 이가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총무회장이었습니다. 역대 자민당 간사장 중 최고령(77세 5개월에 취임), 최장수(5년 2개월) 기록을 가진 그는 일본 정계의 거물이자 대표적 친한파였습니다.
유 대사는 니카이 총무회장에게도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여수 엑스포 홍보물을 직접 보여주며 “독도가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이것을 이유로 인접국 한국의 엑스포 유치를 반대하는 것은 한일 관계의 오점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니카이는 즉각 야치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여기 유 대사가 와서 설명하는데, 도대체 말이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자민당 총무회장 명의로 서한을 쓰겠다”며 “내가 자민당은 책임지고 다 조정해서 처리할 테니까 한국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2007년 여름을 지나며 일본의 공식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아베 신조 총리의 사임과 후쿠다 야스오 내각 출범 등 정치 환경 변화도 영향을 미쳤지만, 유 대사는 기본적으로는 니카이의 결단과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니카이는 후쿠다 내각에서 경제산업성 대신으로 입각, 엑스포 주무 장관이 됐습니다. 유 대사가 그를 예방했을 때, 니카이의 집무실에는 여수 엑스포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관련 홍보물이 비치돼 있었습니다. 니카이는 관료들에게 여수 엑스포 성공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마라고 지시했습니다. 유 대사는 회고록에서 “그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진짜 한국에 애정을 가진 인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웃 나라 축제 성공에 힘을 보태자”
2017년 7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국방문위원회가 주최한 '2017 한일 우호의 밤' 행사에서 문희상 민주당 의원(왼쪽부터), 니카이 도시히로 일본 자민당 간사장, 박삼구 한국방문위원회 위원장, 하야시 모토오 일본 자민당 간사장 대리, 나종민 문체부 1차관이 건배하고 있다./조선일보 |
제가 도쿄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도 니카이가 2012년 여수 엑스포의 성공에 적지 않게 기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일본 내에서 독도 표기를 문제 삼는 목소리가 나오자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호들갑 떨지 말고 이웃 나라의 축제 성공에 힘을 보태자”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수 엑스포 결정 직후 일본이 가장 먼저 참가 의사를 밝히도록 했고, 엑스포 1년 전에는 일본 여행업계 관계자들을 이끌고 여수를 방문해 일본 내 붐 조성에도 앞장섰습니다. 니카이는 이러한 공로로 2013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니카이의 정계 은퇴
여수 엑스포의 성공에 힘을 보탠 니카이는 지난해 3월 차기 중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히며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정치 귀재’도 2023년 말부터 자민당을 강타한 정치자금 스캔들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니카이의 비서관이 3526만엔 정치자금을 보고서에 기재하지 않고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기소된 후 유죄가 확정되자, 책임을 지기로 한 겁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이를 1면 톱 기사로 전했습니다.
일본 와카야마현 의회 의원을 거쳐 1983년 중의원에 처음 진출 후 13차례 연속 당선됐던 그는 1990년대 말 운수(運輸) 대신을 맡으면서 한국과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전국여행업협회(ANTA) 회장을 겸임하던 그는 ‘김포-하네다’ 노선 개설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지지자들을 이끌고 한국을 찾아 양국 협력 필요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2017년, 2018년에는 2년 연속으로 자신의 파벌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등 총 300~400명을 이끌고 방한했습니다.
2010년엔 자신의 지역구인 와카야마시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일본군 장수 김충선(金忠善·일본명 사야카)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김충선의 후손 집성촌이 있는 대구시 우록동도 방문한 그는 “일본이 반성하고 속죄할 수 있고, 진정으로 양국의 신뢰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다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니카이는 한일 관계에 악재가 생길 때마다 막후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2019년 7월 일본의 반도체 부품 등의 수출 금지로 관계가 악화되자 “먼저 일본이 손을 내밀어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자”고 했습니다. ‘호형호제’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인 박지원 의원(당시 국정원장)이 특사로 파견되자 “도쿄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며 오사카의 한 호텔에 중의원 3명을 데리고 나타나 6시간 동안 해결책을 모색한 적도 있습니다. 당분간 니카이 의원만큼 한일 관계에 열성적인 ‘친한파’ 정치인은 나오기 어려울 듯합니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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